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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촌에 궁궐이 세워졌다면 무사했을까?

책/학술

    만약 신촌에 궁궐이 세워졌다면 무사했을까?

    [임기상의 역사산책①]이성계, 정도전의 손을 들다

    야간개장을 시작한 지난해 5월 경복궁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송은석기자

     

    지난 3월 1일 삼일절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답사모임 회원들을 만나 연세대와 이화여대 뒷산인 안산(鞍山)을 넘어 옛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이 곳에서 열리는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창립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296m 높이의 안산은 산세가 말의 안장과 비슷하게 생겨서 붙인 이름이다.

    봉수대에 올라가서 둘러보니 안개가 껴있어 신촌 일대가 흐릿한 실루엣으로 보일 뿐이다.

    산세가 완만하고 넓은 구릉지가 펼쳐진 신촌일대를 바라보면서 '조선의 대궐터가 이곳에 자리잡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조 이성계, 주사위를 던지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고려의 500년 도읍지인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를 찾고 있었다.

    개경은 고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시민들은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반가와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도읍지로 천도하는 것도 반대하는 기존 권문세족들의 본거지였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창업하자마자 수도를 옮길 것을 결심하였다.

    이성계는 권중화, 남은 등에게 한반도 최고의 명당자리를 찾아보라고 명했다.

    가장 먼저 후보지를 떠오른 곳이 계룡산 자락이었다.

    이성계는 즉각 공사를 명하여 새로운 궁궐 조성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관상학과 풍수지리에 능한 하륜이 계룡산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큰 강을 끼고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지 선정에 재론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민에 빠진 이성계는 공사를 중단시키고 정도전과 무학대사. 그리고 하륜을 불러들여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게 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양을 추천하였다.

    한 국가의 도읍지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물류수송과 방비에 편리한 큰 강을 끼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강은 국토의 허리에 있고 바다와도 가까와 중국과의 교류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궁궐의 위치와 좌향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먼저 하륜이 주목한 곳은 무악(毋岳) 일대였다.

    무악산은 지금의 안산(鞍山)으로 그 앞에 연세대와 이화여대 자리를 아우르는 신촌 일대를 내려다보는 산이다.

    특히 마포강이 인접해 있어서 조운(漕運)에 유리하고 중국과의 무역에도 좋은 입지를 갖춘 곳이다.

    이성계는 이 곳에 궁궐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계룡산 공사가 중단된 지 6개월이나 지난 터라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개경에 있는 신하들은 여전히 개경만한 도읍지는 없다고 주장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화가 난 이성계는 친히 무악에 올라 정도전과 무학대사,그리고 서운관 등에게 의견을 물었다.

    무악 일대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약하고 도성으로서 부지가 좁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또한 "무악은 장래에 나라를 도둑질할 사람이 살 땅 입니다"라는 서운관의 발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어쩌면 고려를 도둑질한 이성계 본인을 두고 한 말 일 수도 있다.

    600년 후에 무악산 아래 살던 사람들이 일으킨 군부 쿠테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기분이 상한 이성계는 다시는 무악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동시에 북악산과 인왕산 아래의 부지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궁궐지를 놓고도 政殿의 坐向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북악을 좌청룡,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동향하여 궁궐을 배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타산(동대문 옆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南面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통 유학자인 정도전은 중국의 모든 황궁과 고려의 궁궐도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임금이 남면해아 하는 것이 유학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풍수도참설의 하륜과 불교 숭배자인 무학대사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와 도성의 설계까지 본인의 손으로 완성하게 된다.

    심지어 경복궁 건물의 이름과 4대문 안 동네 명칭까지 경전을 뒤져 작명까지 한다.

    훗날 정도전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정적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름을 고치라고 했으나, 검토해본 결과 "그 이름들 중에 고칠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는 보고만 올라왔다.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은 200년 후 광해군의 인경궁 건립공사에 힘입어 재현되는 듯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송은석기자

     

    무악산 주산론...거듭 부활하다

    그러나 하륜의 무악산 주산론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꾸준히 부활했다.

    이성계에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이방원보다 20살이나 많은 하륜은 방원의 관상을 보고 그에게 접근하여 그의 책사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는데,태종의 정략과 정책들은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제1차 왕자의 난과 정도전 제거등을 기획하고 총지휘하며 이방원의 왕위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개성으로 환도한 후 즉위한 태종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새 궁궐을 짓기로 결심한다.

    왕자의 난과 관련해 경복궁과의 악연에 치를 떨던 태종은 새로운 별궁 터를 물색하였는데 하륜이 다시 무악산 자락을 들고 나왔다.

    태종은 하륜의 안에 동조하는 듯 하다가 북악산 동쪽 응봉 아래에 있는 지금의 창덕궁 터를 점지하였다.

    이는 하륜이 궁궐 선정과 신축의 지휘자로 올라서면 정국을 주도하며 세력을 키워 갈 것을 우려한 태종의 지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륜은 이에 굴하지 않고 또다른 대규모 토목 사업을 제시하였다.

    고려조에 시행하려다 무산된 순제 안흥량(지금의 태안반도)에 운하를 판다는 계획이다.

    다각도로 사업 타당성을 분석한 결과 불가하다고 판명되었으나 하륜은 군사 5천여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바위산과 구릉지를 통과해야 하는 난공사인데다 당시 공사기술이 부족해 결국 중단되었고 예산만 낭비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 계획은 200년 후 대동법의 선구자 김육에 의해 그 곳에 운하가 일부 조성되는 등 가능성이 검증된 바 있다.

    또 한번은, 장마철마다 청계천이 범람하자 준설공사를 벌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에 고무된 하륜은 용산강에서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운하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갈수기에 물을 가둬두기 어렵고 물이 땅속으로 스며 들어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과 아낌없는 지원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하륜은 정도전의 정책을 대부분 무력화시켰다.

    정도전이 꿈꾼 사대부에 의한 臣權中心의 양반사회를 王權中心의 전제국가로 회귀하게 하는 등 태종의 1인통치에서 브레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조선 초기의 정치제도는 물론 관제, 군제를 정비하고 조세제도를 혁파하고 호패법 시행, 신문고 설치등 대부분의 개혁법안이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대 그의 지략은 600년 후를 내다본 듯하다.

    무악에 경복궁이 세워졌다면?

    그의 혜안이 약간은 빗나갔지만 무악산 아래에서 전두환,노태우,김대중 등 3명의 임금(?)이 배출되었고, 그가 구상한 삼남을 잇는 대운하계획은 아직도 살아 꿈틀대고 있다.

    정도전이 조선을 기획하고 큰 뼈대를 만들었다면 하륜은 거기에 살을 붙히고 피를 통하게 하여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KBS 드라마 때문에 역사에 묻혀져 있던 정도전을 재조명하는 일이 한창이다.

    그러나 정도전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하륜의 업적도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도전이 기획해서 세워진 경복궁은 오늘도 건재하고 있다.

    임진왜란 와중에 불타 없어졌다가 대원군이 다시 재건하고,일제가 뭉개버린 궁궐이 노태우 정부 때부터 차곡차곡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만일 신촌 일대에 궁궐이 세워졌다면 어떠했을까?

    임진왜란의 불길과 일제의 무자비한 조선 흔적 없애기를 피해가지 못했겠지만, 한국전쟁의 폭격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사령부는 한국인 군속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사대문안은 공군의 공습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 등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신촌 일대는 폭격 범위에 들어가 모두 불탔을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은 600년의 세월을 견디었고,앞으로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고, 뒤로는 북한산과 백악의 기를 받아 이 시간에도 꿋꿋히 서울의 상징으로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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