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규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1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촌동 의사협회 회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부와의 협의사항을 발표하기 위해 참석하고 있다. 양측은 오는 24일로 예정된 2차 집단 휴진을 막기 위해 총 네차례의 의정 협상을 벌인 끝에 원격의료 입법 전 6개월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건정심 구조를 개선하는 등 주요 쟁점에 합의했다. 윤성호기자
대한의사협회가 정부와의 협상에서 원격의료의 시범사업 외 얻은 가장 큰 것이 있다면 바로 '건정심' 위원이다.
'건정심'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줄임말로 주요 보건의료 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정부 산하 위원회이다.
건강보험의 주요 결정은 모두 건정심 의결을 받도록 건강보험법에 명시돼 있다. 한해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올릴지도 여기에서 결정된다. 수가도 건정심과 관련이 있다. 의협과 건강보험공단의 수가 협상이 결렬되면 곧바로 건정심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수가도 여기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치료행위나 약제를 건강보험에 적용할지 말지, 어느정도 금액으로 할지도 모두 건정심에서 결정된다. 한마디로 보건의료정책의 상원 역할을 하는 핵심 의결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건정심은 공급자 대표, 가입자 대표, 공익위원 등 8명씩 24명과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차관을 포함해 총 25명으로 구성돼 있다. 공급자 대표는 의사협회 2명 외에 병원협회·치과의사협회·한의사협회·간호협회·약사회·제약협회가 각각 1명씩 나눠갖는다.
가입자 대표는 근로자 대표 2명(한국노총, 민주노총), 사용자 대표 2명(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 시민단체(바른사회시민회의), 소비자단체(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농림단체(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자영자단체(한국외식업중앙회)가 각각 들어간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공익위원이다. 공익위원은 보건복지부와 기획재정부 대표 2명과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추천하는 인물이 각각 1명씩 들어가며 나머지는 교수와 학계에서 4명이 들어간다.
교수와 학계 및 건보공단과 심평원 추천 몫은 사실상 정부측 인사이다. 공익위원 8명 모두 정부가 선임하는 구조인 것이다.
민관 합동 위원회 형식을 띄고 있지만 건정심에서 정부측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볼 수 있다. 이같은 건정심의 편향적 구조는 감사원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감사원은 지난 2004년 건강보험 운영실태 감사보고서를 통해 "건정심은 보험료와 요양급여비용 조정 등 가입자와 의약계간 이해가 상충되는 사안을 다루기 때문에 객관적인 공익대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전제하면서 공익대표 구성의 문제를 거론했다.
당시 감사원은 "공익대표 8명 중 6명을 정부나 산하기관이 위촉해 공익대표의 역할을 사실상 수행하기 어렵다"며 "건정심 위원 중 공무원 2인을 제외한 나머지 공익위원은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를 위촉 또는 임명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18대(손숙미 의원), 19대 국회(박인숙 의원)에서도 건정심 구조 개혁에 관한 법률은 꾸준히 발의됐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건정심의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그간 의사협회와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꾸준히 건정심 구조 개혁을 요구했지만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논의는 미뤄졌다.
이번 2차 집단휴진을 막기 위한 정부와의 협상에서 의협이 챙긴 부분이 바로 이 건정심 구조 개혁이다. 직접적인 수가 인상 대신에 의협은 건정심에서 공익위원을 사용자 단체와 공급자 단체가 동수로 나눠 가질 것을 요구했다.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국민건강보험법'개정을 연내에 추진한다고 시기까지 못박았다. 이렇게되면 의사협회 등 공급자 단체의 몫이 최대 4명까지 늘어날 수 있어 건정심의 권력 축이 이동할 수 있다.
노환규 의협 회장은 "건강보험의 정책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 최종 심의의결기구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구조개편에 있어 정부가 법개정을 동의했다는 점이 가장 유의한 진전이었다"며 건정심 개혁을 이번 협상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권덕철 보건의료정책관은 "8명의 공익위원이 정부측 추천인사로 구성돼 있어 공정성에 문제가 제기돼 왔고 이는 2004년 감사원 지적사항이기도 하다"며 "공익위원이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구성을 바꿔가자는 것이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로 법 개정이 추진되기까지는 이해관계와 맞물려 치열한 논의들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 추천 몫을 얼마나 줄일지, 공급자와 가입자 단체는 어떤 곳에서 몇명이 들어갈지를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공익위원 정원 8명을 더 늘릴지 말지 여부도 논의해야 한다.
전병왕 보건복지부 보험정책과장은 "공익위원 숫자를 늘리는 것이 좋을지 배분율을 달리하는 것이 좋을지는 추가로 논의해봐야 한다"며 "방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송형곤 의사협회 대변인은 "공급자와 가입자 동수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각각 4명씩 나눠갖는 것이다. 이제와 숫자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해 신경전을 예고했다.
한편, 건보공단과 의협의 수가 협상이 결렬되면 곧바로 건정심으로 가던 구조에서 중간에 '조정소위원회'를 두기로 한 것도 의협이 챙긴 성과의 하나로 꼽힌다.
수가 협상이 결렬되면 의협에 다소 불리했던 것에 비해, 조정소위원회가 생기면 공급자단체가 한 번 더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당장 올해 5월까지 건보공단과 의협이 수가 협상에 나서는 가운데 협상이 결렬됐을 때 조정소위원회가 역할을 할 지, 실질적인 수가 인상으로 이어질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