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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수뇌부, '숙취' 중에 남침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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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 '숙취' 중에 남침을 당하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85]국방부장관과 작전국장까지 연락이 두절됐으니…

    ◈ 국군 수뇌부는 술이 덜 깨고, 장병들 1/3은 영내를 떠나다

    한국전쟁 초반에 전사한 국군의 시신. 일요일 새벽의 기습에 국군은 순식간에 붕괴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육군본부 정보국 일직장교 김종필 중위(훗날 국무총리를 지낸다)는 포천에 있는 7사단 정보처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떨어집니다~ 막 포탄이 떨어집니다"

    김 중위는 북한 인민군의 전면적인 남침이 시작됐다고 판단했다.

    이보다 30분 전인 새벽 4시경, 북한 인민군 10개 사단 병력이 24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운 채 일제히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이날 남한에 있는 미 고문단 500명 가운데 38선에 가까이 있는 장교는 조셉 다리고 대위 단 한 명이었다.

    새벽 5시경 개성 동북쪽에 있는 그의 집에 포화 소리와 함께 총탄과 파편이 날아왔다.

    그는 서둘러 개성으로 지프차를 몰고 가다 개성역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인민군이 끊어진 철로를 이어 기차에 탱크와 차량, 병사 1,000명을 싣고 내려와 개성역에서 하차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9시에 개성이 함락되었다.

    남침의 최전선에 선 인민군 탱크부대.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간다.

     

    국군 수뇌부는 이때 뭘 하고 있었을까?

    대부분 새벽까지 술을 마셔 술이 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전날 저녁에 육군 장교클럽 개관식을 기념하는 성대한 댄스 파티가 열렸다.

    장교클럽 식당에는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단장들, 육군본부의 참모와 고위장교들 약 50명과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부인이나 애인을 데리고 참석했다.

    파티는 밤 10시에 끝났으나 다수의 참석자들은 2차, 3차 술자리로 자리를 옮겨 새벽까지 술 파티가 이어졌다.

    한국군은 결국 숙취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것이다.

    더구나 이틀 전 계속 유지되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어 일선부대마다 약 1/3에 달하는 병사들이 휴가와 외출을 떠난 상태였다.

    북쪽은 은밀히 전선으로 집결해 어둠 속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반면, 남쪽은 술에 취해 흥청거리거나 부대를 비우고 놀러나간 이상한 조합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진 채병덕 총참모장은 새벽 2시에 귀가했다가 3시간 후인 5시경 보고를 받았다.

    채병덕은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육군본부에 명령을 내렸다.

    "뎐군에 비상하라(전군에 비상을 걸어라)"

    이 비상명령은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비상명령을 집행해야 할 장창국 작전국장이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전화가 가설돼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대문 근처에 있다는 그의 집을 찾으려고 헌병 백차가 달려가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창국 대령님~ 비상입니다"라고 가두방송을 하고 다녔다.

    더 한심한 인물은 육해공군을 총지휘해야 하는 국방부장관 신성모다.

    전쟁이 터지기 일주일 전 38선을 방문한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중절모를 쓴 인물)과 신성모 국방장관 (그 오른쪽). 신성모는 대한민국 최악의 국방부장관이었다.

     

    전군에 비상을 건 채병덕은 신성모 국방부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는 사람이 없었다.

    채 총장은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다.

    신 중령의 설명이 걸작이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개인이 아닌 공인이고, 나라의 국방을 책임진 국방부장관이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전화를 받지 않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육군 총참모장은 지프차를 타고 장관 공관에 찾아가 보고하고 비상동원령 선포 재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신성모가 이후 한 일이라고는 국무회의와 국회에 나가 "걱정할 것 없다. 일주일 안에 평양을 탈취할 자신이 있다"고 허위보고를 한 것 뿐이다.

    그리고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피난갈 것을 권하고, 이승만이 도주하자 서둘러 수원역으로 달려가 역장실에서 대기한 것 밖에 없었다.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터졌을 때 한가롭게 창덕궁 비원의 반도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적에 동조할 것 같은 국민을 재판없이 처형하라고 명령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항의 전화를 한 것 밖에 없다.

    그리고나서 27일 새벽 정부와 서울시민을 버리고 도둑놈같이 몰래 남쪽으로 도주했다.

    같은 시간에 미국 대사관은 미리 만든 매뉴얼에 따라 비전투 미국인 2,001명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모두 피신시켰다.

    ◈ 인민군 탱크 2대가 국군에게 혼란을 불러 일으키다

    인민군의 침공 방향을 그린 지도. 개성과 철원을 출발한 주력부대가 서울을 점령하는 사이에 춘천과 홍천에서 남하한 부대가 수원으로 진출해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사진=전쟁기념관 제공)

     

    인민군의 주공은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었다.

    3개 방면으로 진격한 1군단은 의정부와 문산으로 향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이 여기에 대응해 벌인 작전은 후방에서 무질서하게 올라오는 부대를 그저 차례차례 투입한 것이다.

    대오를 정비해 일거에 반격을 가하는 전략이 실종된 것이다.

    국군이 패퇴를 거듭한 가장 큰 원인은 탱크를 저지할 무기가 없다는 것이다.

    대전차로켓이나 지뢰도 없었고, 유일하게 보유한 57mm 대전차포는 두꺼운 장갑을 두른 소련제 T-34탱크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개전당시 국군의 주력 대전차병기였던 57mm 대전차포. T-34 전차에는 겨우 흠집이나 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전쟁 이틀만에 의정부를 점령한 인민군이 미아리에 진을 친 국군의 마지막 방어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국군은 27일 밤까지 완강하게 적의 돌파를 저지했다.

    28일 새벽 은밀하게 홍릉 방면으로 진출한 탱크 2대가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후방에 나타난 적 전차를 보고 미아리 방어선은 이내 붕괴되고 말았다.

    돈암동에 나타난 탱크를 목격한 강문봉 대령이 채병덕 총장에게 달려와 "적의 전차가 서울시내에 침입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아직 인민군 주력은 미아리 고개에 포진하고 있을 때였다.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는 인민군 탱크부대.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힘을 잃게 된다.

     

    강 대령의 급보를 받은 채 총장은 더 자세한 정황을 확인하지 않고 서둘러 최창식 공병감에게 전화해 "즉시 한강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채병덕을 비롯한 육군본부 참모들에 이어 이시영 부통령이 한강 인도교를 넘자마자 새벽 2시 30분경 엄청난 폭음소리와 함께 한강교가 폭파됐다.

    이것마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5개의 한강 교량 중 2개가 일부만 파괴되고 멀쩡히 살아 남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터지고 난 후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반드시 폭파해야 했던 임진강 철교와 춘천의 모진교, 서울의 한강 교량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완전히 끊어진 한강 인도교. 그 옆의 철교 2개는 일부만 파손됐다.

     

    강북에는 그때까지 국군 6개 사단 (1사단, 2사단, 3사단, 5사단, 7사단, 수도사단) 44,000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지휘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중장비는 물론 소총까지 다 버리고 후퇴를 해야 했다.

    의정부에서 혈전을 벌이던 7사단의 경우 모든 장비를 버리고 한강을 헤엄쳐 건너 겨우 500명의 장병이 기관총 4정만 갖고 한강을 건넜다.

    ◈ 서울방어작전은 사라지고, 시민들만 남과 북으로부터 고초를 겪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보신각과 그을린 보신각종. (1950년 9월)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 준장은 서울이 위협을 받자 미군이 참전할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적인 시가전을 벌이자고 권고했다.

    그러나 이 작전을 통합 지도해야 할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은 벌써 도주한 지 오래됐고, 육군본부는 성급하게 한강교량을 폭파함으로써 서울 사수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인민군은 어떻게 했는가?

    인천상륙작전 때 전력이 열세였던 인민군은 서울을 요새화해서 무려 열흘 가까이 방어했다.

    그들은 평양 교량을 어떻게 폭파했나?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국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교량 폭파작전은 인민군이 실시한 1950년 10월 19일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의 폭파였다.

    그들은 전면 후퇴하는 혼란 속에서도 얼마 남지않은 인민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모두 철수시킨 다음 유엔군이 도달하기 바로 직전 완벽하게 교량을 폭파했다.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다 지쳐 쓰러진 국군 병사들.

     

    고관대작들이 서둘러 도주하고 황급하게 한강교량을 폭파하면서 서울은 완벽하게 인민군에게 기증되었다.

    한강 북쪽에 갇힌 150만 명의 서울시민들은 3개월 동안 악몽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승만과 신성모 등 서울시민을 버리고 도망간 지도자들은 서울이 수복되자 이번에는 '부역자'를 처단한다며 시민들을 들볶기 시작한다.

    서울은 물론 지방의 각 경찰서에는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잡혀온 남녀 시민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마치 '서자' 또는 '이등 국민',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는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이 경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밤마다 술과 고기를 대접하기도 했다.

    피난갔던 사람들이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등쳐먹는 일도 많았다.

    정부를 믿었다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던 소설가 박완서 씨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년이고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빨갱이를 색출하고 혼내줄 수 있는 기관은 수도 없이 난립돼 있었다. 이웃이 우리를 계속 수상쩍게 여기는 한 나는 그들의 밥이었다. 그들은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돼 있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 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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