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세훈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을 두고 논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직 판사가 원세훈 사건 선고를 두고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내부전산망에 직격탄을 날렸다가 징계까지 받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원세훈 사건'은 양승태(대법원장)호(號) 법원이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보수획일화된 세간의 평가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급격하게 줄고 있는 법원-정치권력간 거리감이다. 자칫하다가는 '사법-행정 신밀월시대'라는 평가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
CBS는 두 번에 걸쳐 현 사법부의 문제점을 진단해본다. [편집자 주]◈ 대통령 한마디에 대책 내놓는 대법, 삼권분립은 어디에?
대법원. 자료사진
세월호 참사 후폭풍이 한창 계속되던 지난 5월 20일. 대법원은 한 장의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사법부의 후속 대책을 담고 있는 보도자료였다.
이 자료에서 법원행정처는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의 선고형이 지나치게 낮아 형법 개정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됨에 따라 사법부 차원에서 바람직한 입법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앞으로 광주지법에서 진행될 이준석 선장 등에 대한 재판에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의 의견이 적극 반영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전날 대국민담화문에서 “수백 명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라고 규정하고 ”선진국 중에서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야기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수백 년의 형을 선고하는 국가들이 있다“고 언급한 터였다.
워낙 세월호와 관련된 뉴스들이 많이 양산된 때여서 대법원의 대책발표는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법원 내부와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원행정처의 조치에 우려감을 나타냈다.
세월호 참사가 참사인지라 법원도 '사고 책임자'에게 적극적으로 엄벌에 처한다는 취지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법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사법부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 법조계 인사는 “대법원이 검찰이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청와대가 지침을 내려놓으면 바로 대책을 내놓는 것은 행정부 소속인 검찰이 해야할 일이지 행정부를 견제해야할 사법부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정의당 서기호 의원도 “대법원이 대통령의 어떤 행정부 기관처럼 행동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한 치의 오해도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재판의 신뢰가 생기는 것인데 그것이 무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울 중앙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대통령이 재판도 받지 않은 세월호 승무원들에게 살인죄를 의율해야 한다는 식으로 사법의 영역을 침범하는데 대해, 사법부가 오히려 견제를 했었어야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양형위원회의 ‘가이드라인’, 흔들리는 법관 독립더 심각한 것은 이같은 법원행정처의 움직임이 일선 재판부에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6월 9일에 열린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전효숙)의 권고는 더욱 노골적이다.
이날 양형위원회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유발하는 안전사고와 관련한 형사사건에서의 양형’에 관해 논의했다.
양형위원회는 “이미 설정된 양형기준은 피해규모가 크지 않은 전형적인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것이어서 세월호 참사처럼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에는 달리 판단해야 한다”며 “양형에 ‘국민적 염원’을 중요하게 참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세월호 승무원 사건을 맡은 재판부에게는 중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이다.
사법부는 판사들이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2~3중의 방어벽을 치고 있다. 판사 인사에서 원칙적으로 승진 개념이 없으며,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이라 하더라도 일선 판사들에게 재판과 관련해 어떤 지시를 내리거나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은 일선 판사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사법부 고위층의 입김을 막기 위해서다.
{RELNEWS:left}하지만 박병대 처장의 법원행정처는 이 같은 불문율을 하나 둘씩 깨트려가고 있다. 법원행정처 내부에서도 안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박 행정처장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일선 법관의 독립이 법원 고위층의 입김에 좌우될 경우 생기는 폐해는 심각하다. 우선 재판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면서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팽배해질 수 밖에 없다.
사법부에 대한 이같은 불신은 국민들의 사법부 판결에 대한 불복으로 이어지면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단순히 사법부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