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2003)의 송강호, '올드보이'(2003)의 최민식, '실미도'(2003)의 설경구, '너는 내 운명'(2005)의 황정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신뢰도를 한층 끌어올린 배우 계보다.
이들은 흥미롭게도 그 당시 만들었던 흐름을 올해 오롯이 재현하는 모습을 보였다. 송강호는 '변호인'으로 올해 첫 1,000만 영화의 포문을 열었고, 최민식은 지난 여름 '명량'으로 1,761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새로 썼다.
가을에는 설경구가 '나의 독재자'로 시대를 관통하는 물오른 연기를 선보이더니, 황정민은 올겨울 기대작으로 꼽히는 '국제시장'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한목소리를 낸 이들은 개개인이 수천 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온 막강한 티켓 파워를 과시한다.
영화 칼럼니스트 김형호 씨는 "이 배우들의 경우 단순히 관객 동원 능력을 떠나 한국영화 시장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는 데 남다른 의미를 지닌 인물들"이라고 평했다.
김 씨는 "한창 조폭 소재의 영화가 주를 이루던 2000년대 초반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출현은 관객들에게 '한국영화도 볼 만하다'는 인식을 심어 준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그는 이들 배우의 강점이자 공통점으로 "탄산음료의 청량감 같은 느낌"을 꼽았다. "어떤 역할을 맡든 그 캐릭터로 변신하기보다는 자기화하는 뛰어난 역량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고, 이 점이 10년 넘게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토양이 됐다"는 것이다.
김 씨는 "한국영화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주는 이들 배우를 찾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며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이 50, 60대가 돼더라도 이들의 연기를 봐 온 관객들은 꾸준히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고자 극장을 찾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믿고 보는 배우 계보학 바탕은 소재의 다양성"
하지만 이는 곧 대단위 가족 관객을 움직이는 배우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차세대 얼굴의 부재라는 문제로 직결될 수 있다. 제2의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이 없는 한국영화계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말이다.
김 씨는 "10여 년 전 한국영화계는 제작 편수가 훨씬 적었지만, 이러한 배우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며 "지금은 제작비 상승 등으로 안전성을 택하다보니 구조적으로 새로운 얼굴을 키우려는 시도가 줄어든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손예진 하지원 등을 이을 여배우 기근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김 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극장을 찾은 관객이 2억 명을 넘어선다면 올해를 진단하고 내년을 전망해야 하는데, 현재 한국영화 시장의 구조에서는 몇몇 배우 말고는 대안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며 "현재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배우들이 고정 시장을 가져간다는 것을 전제로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한 고민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최근 김 씨는 내년에 로맨스·멜로 장르가 어느 해보다 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는데, 여기에는 이들 장르의 주요 관객층인 20대를 만족시켜 줄 젊은 배우의 출현을 바라는 견해가 뿌리내리고 있다.
그는 "한국영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소재의 다양성이 바탕에 깔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안전성만을 추구하는 현재의 기획 풍토가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씨에 따르면 현재 한국영화는 '과정 중심'의 여성성 강한 이야기·연출보다는 '결과 중심'의 남성성 강한 이야기·연출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결과 중심의 영화는 마지막 반전이 중요한 만큼 극중 배우가 잊히는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인지도와 선호도를 갖춘 배우들 위주로 캐스팅이 이뤄지게 된다.
반면 과정 중심의 영화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과정을 관객들이 즐기게 되기 때문에 배우들의 면면이 부각돼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영화 소재가 다양하려면 단순히 상품을 찍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들이 창작을 펼칠 수 잇는 환경이 우선돼야 한다"며 "그 이후 다양한 영화에 맡는 배우들을 찾는 노력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작가들의 창작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렇게 태어난 다양한 배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얼굴들을 찾으려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