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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국민에게 대놓고 항명하는 청와대

    [변상욱의 기자수첩]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박재홍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가 지난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청와대 문건유출 현안보고와 관련 민정수석의 출석 문제를 놓고 여야가 격한 논쟁을 벌이자 정상적인 회의 운영이 어렵다며 정회를 시킨 뒤 여야 의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윤창원기자

     

    청와대 민정수석이 비서실장의 국회 출석 지시를 거부하다 사의를 표명했고 대통령은 사표를 수리했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민정수석의 항명이요 대통령의 곤혹스러움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해 털어놓아야 할 것은 많다. 십상시라는 존재는 없고 7인회가 청와대 내부 기강을 어지럽히는 존재라면 7인회의 실상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서 7인회는 드러난 것이 없으니 민정수석실은 7인회라는 가상의 비선조직을 조작해 낸 것인지에 대해 밝혀야 한다. 언론에는 7인회 배후설, 청와대 감찰보고서의 내용이 잔뜩 흘러나왔는데 언론의 소설이었는지 청와대의 물타기였는지도 국민은 궁금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또 하나는 문건 유출 혐의를 받는 한 경위에 대한 회유 내지는 압력의 의혹이다. 이것은 경찰관 1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이에 대한 진술도 민정수석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 해명도 진술도 없이 떠났다. 그냥 떠나면 도피시키는 게 되니까 항명을 해 내쫓긴 것처럼 떠났다. 이것은 겉보기엔 항명일지 몰라도 ‘복명復命 같은 항명’으로 보인다. 민정수석의 국회출석 답변이 5차례나 있는데 나쁜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항명인 척 떠나며 입을 닫아 지키려한 사람들이 누군지 몰라도 그 사람들이 국정농단 파동의 핵심일 가능성이 크다.

     

    ◈항명의 추억 ... 그 땐 검찰이 이랬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 주변에서 벌어진 역사 속 항명들을 살펴보자.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꼿꼿한 검사들이 대통령에게 항명했다.

    대한민국 검찰 초대 서울지검장을 지낸 최대교 선생. 1949년 9월, 당시 임영신 상공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양녀로 불리던 권력 실세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본인 및 측근들의 뇌물과 사기 혐의가 드러났다. 최 검사장은 검사들을 지휘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장관의 여동생부터 구속시켰다. 그러자 임 장관은 여동생의 세 살짜리 어린애를 안고 경무대로 달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살려 달라 빌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임 장관의 동생을 풀어주고 사건을 매듭지으라 법무장관을 통해 지시했다. 그러나 최 검사장은 장관과 총장을 통해 내려 온 요구를 뿌리치고 임 장관을 재판에 넘겼다. 이런 소신행동이 여러 차례였기에 그는 결국 옷을 벗었다. 최 검사장의 부인은 집에 걸핏하면 쌀이 떨어져 풀칠로 봉투를 만들어 내다 팔아 살림을 꾸렸고, 최 검사장도 도시락으로 누룽지를 싸왔다고 한다. 기자들도 ‘누룽지 검사’라 별명은 붙였지만 존경해 마지않았다는 .... 지금 들으면 신화같은 이야기이다. 전주시내 덕진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초대 검찰을 지나 2대로 넘어가면 김익진 검찰총장이 등장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압력에 버티다 검찰총장에서 서울고검장으로 강등되는 항명파동의 주인공이다. 6.25 전쟁이 티지기 전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 있었다. 정치브로커 일당이 "공산당 게릴라들이 대통령을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허위로 흘린 뒤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사설경찰 조직을 허락받은 뒤 공산분자를 잡는다며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간첩조작을 했던 사건이다. 김익진 검찰총장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사설 브로커 폭력배들을 처벌하려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으므로 검찰은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총장 지휘를 받은 검찰은 거리낌 없이 수사해 일당 108명을 검거하고 주범 11명을 재판에 넘겼다. 그리고 이들 폭력배의 뒤를 봐준 치안국장, 내무부 장관도 수사하기 시작했다. 김익진 검찰총장은 검사들에게 대통령의 의중 자체를 전달조차 하지 않고 낱낱이 수사하도록 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옷 벗고 나가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김 총장은 대통령이 나가란다고 검사가 순순히 나간다면 검찰 수사의 정치적 독립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못 나간다고 버텼다. 이승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강등 시키는 것으로 우회적 방법을 통해 그를 제거했다. 오늘의 검찰이 벌이는 종북몰이와 비교해 볼 일이다.

    ◈절대권력 박정희 정권 하의 항명

    1969년 4.8 항명부터 시작해 보자.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2번하고 한 번 더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그건 너무하지 않냐라는 반대세력이 생겨난다. 양순직 예춘호 정태성 등이 주역인데 나름 혁명세력과 대통령을 위한 충심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직접 맞서기는 뭐하니 3선 개헌 하려해도 국회에서 힘들다는 걸 넌지시 알리고자 했다. 마침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에 올라왔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여당의 힘으로 해임건의안을 부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명파들은 야당의원들과 짜고 가결시켜 문교부장관을 내쫓았다. 이것을 4.8 항명사건이라 부른다.

    이들은 당연히 제명처분 등의 응징을 당한다. 정구영 김종필 등 혁명 개국공신 2인자 그룹이 이 사건으로 뒷선으로 물러나고 3선 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한다. 이 때 공을 세우며 등장한 것이 공화당 4인방 ...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 이다. 4인방이 당권을 잡고 실세로 군림하던 중 1971년 가을 실미도 사건, 광주 폭동 사건 때문에 장관해임안이 무더기로 국회에 올라온다. 10월 2일 국회에서 모두 기각시키라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도 불구하고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만 통과되어 버린다. 바로 4인방이 주도한 항명이었다. 왜 오치성 내무장관이 문제였을까? 오치성은 친 김종필계로 4인방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오치성 내무장관이 4인방의 측근인 시장, 군수, 경찰서장들을 잘라내고 내쫓으며 4인방의 세를 약화시키려 했기에 그 보복이 가해진 것이다.

    4인방은 자신들에게 얹어진 대통령의 신뢰를 믿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4인방과 4인방에 협조한 국회의원 20 여명을 색출했고 주동자들은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그때 유명한 일화가 박 대통령이 서울컨트리 클럽 1번 홀로 가더니 골프공을 쌓아놓고 김** 이 xx, 길 00 나쁜 xx 하며 골프공을 마구 쳐댔다는 것. 그리고 잡혀 간 사람 중에 멋진 콧수염 시쳇말로 카이저수염을 늘 기르고 다니던 김성곤 의원의 일화도 유명하다. 쌍용그룹 창업자로 여당 재정위원장이기도 했던 막강한 그에게 고문 기술자들은 “야, 네가 카이젤이냐? 콧수염이 니 자존심이다 이거냐?”하며 그의 콧수염을 한쪽만 뽑고 다른 한쪽은 일부러 남겨 놓으며 치욕을 줬다 한다. 그는 칩거해 살다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숨졌다.

    김성곤 의원과 함께 중정에 연행된 길재호 의원도 육사 8기의 개국공신이지만 몽둥이질과 고문으로 남은 생을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살았다.

    청와대 풍경. (황진환 기자/자료사진)

     

    ◈국민에게 대놓고 항명하는 정권

    문민 정권 시대로 접어들어서도 항명은 있었다. 대표적인 항명 파동은 이회창 총리가 허수아비 총리 노릇을 사절한다며 김영삼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물론 김 대통령과도 수시로 충돌하다 사임 압박이 들어오자 취임 127일 만에 사표를 내버린 것. 그는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나중에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다시 이회창 전 총리를 앉혔으나 역시 충돌했다. 그는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며 탈당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2004년 6월에 벌어진 당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대통령의 충돌이 대표적 항명 사건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의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계급장을 떼고 토론해 보자”는 성명을 내며 충돌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도 진영 보건복지부장관 사표가 이와 비슷한 항명 파동이었다. 기초노령연금 공약이 후퇴한 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고 장관직을 내놓고 떠나는 걸로 끝났다.

    이명박 정권 때는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55인 항명 파동이 기억할만한 사건. 정두언 전 의원이 주축이 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한 사건이다. 이 항명은 성공은 못했지만 개국공신들 다수가 개입돼 있어 친이 세력의 분열과 함께 레임덕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대통령 주변의 항명이란 대통령이 자신을 둘러 싼 권력관계를 컨트롤하며 안정된 형태로 이끌어가지 못할 때 곪다가 터지는 상처이다. 이를 통해 사태가 수습되면 권력구도가 재정립되기도 하지만 레임덕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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