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교수(좌)와 홍세화 씨(우)
"한국사회에 갑질만 있나? 을질, 병질도 많다."
박노자(42)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지난 16일 저서' 비굴의 시대' 출간을 기념해 카톨릭청년회관 다리 대강당에서 연 '박노자-홍세화 대담'에서 한 말이다. 책 '비굴의 시대'에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증발한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박노자 교수는 이날 대담에서 "가장 무서운 비굴은 자신이 받는 억압이나 착취에 맞서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보다 사회적 서열이 낮은 사람에게 또 다른 착취를 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국사회는 갑질 뿐아니라 병질, 을질도 존재한다"며 "가령 재벌 3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저지른 '땅콩 회항' 사건은 분명 갑질이지만 일반 고객도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진상을 부리며 을질을 한다. 문제는 층층이 쌓인 억압의 구조인지라 을질을 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조차 알바 같은 더 하급 노동자에게 병질을 한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중차별하면 자신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개선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각자도생 사회에서 빠지기 쉬운 비굴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그는 갈수록 높아지는 노동시장 진입 장벽 때문에 사회적 연대가 절실한 대학생 간에도 "자신이 차별당하는 만큼 자신보다 아래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비굴이 존재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울,수도권 대학생이 지방 대학생을 멸시하고, 또 같은 서울,수도권 대학생 사이에서도 서울 캠퍼스와 지방 캠퍼스를 구분하는 모습을 본다."
박 교수는 또 "최악의 착취구조에 놓인" 텔레마케터와 노르웨이 저가항공사에 고용된 저임금 외국인 계약직 노동자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예로 들며 "본인도 은연 중 갑질을 행한다"고 했다.
"텔레마케터의 전화를 받았을 때 짜증나는 기분을 드러내며 응답한 경우가 있다. 당시 나는 할당량을 못 채우면 월급을 못 받는 그들의 입장보다는 내 사생활만 생각한 거다. 내가 그 상품을 사지 않더라도 그들을 타자가 아닌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지 못했던 것 같아 부끄럽다. 또 다른 예로 노르웨이의 저가항공사는 외국인 계약직 사원을 많이 고용한다. 이들에게 월급을 줄 때는 노르웨이가 아닌 출신 국가를 기준으로 삼는데, 이는 한국에서 중국인을 고용하고 중국 물가에 기반해 월급을 주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저가항공을 이용할 때 항공사 측의 행동이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 했다."
그는 "내가 그들을 인격적으로 모독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이 당하는 착취를 모른 척했다면 묵시적으로 깁질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박 교수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최악의 자기기만이자 또 다른 비굴이다"며 "비굴의 시대에 맞서려면 타자와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릴 때부터 연대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비굴의 시대의 불씨인 진보정당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