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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긍지마저 와르르 "나는 망했다…고로 욕망한다"

문화 일반

    밑바닥 긍지마저 와르르 "나는 망했다…고로 욕망한다"

    [청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上> 배우 최미라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왜 비상구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한국 사회 2030세대의 처지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서, 인간관계와 집 장만을 추가로 접은 '오포세대'로까지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지금 '우리'라는 변혁의 힘을 잊은 채 '개인'이라는 파편에 머물고 있다.

    강도 높은 경쟁 사회에 순응할 것을 강요받으면서, 갈수록 자기 안에 고립되는 탓은 아닐까. 이미 청년 시절을 보낸 기성세대가 "우리 땐 더 힘들었다"는 꾸지람 섞인 조언을 넘어, 후배들의 상처를 다독일 공감의 말을 건넬 수는 없는 것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벌인 두 차례의 닮은꼴 인터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청년백수가 답답한 마음에 찾은 제주 강정마을. 그의 눈으로 바라본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강정마을에서 진행된 '강정 책마을 십만대권 프로젝트'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미라클 여행기'에 출연한 배우 최미라씨가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씨 뒤로 국가권력의 심장부 청와대가 보인다. (사진=윤성호 기자)

     

    수 년간 진정 하고 싶은 일 찾아 다닌 뒤 내린 결론 "망했구나"
    강정마을 사태 다룬 다큐 '미라클 여행기' 출연…'우리'에 눈 떠
    파괴된 마을 공동체 목격 "몰랐어요…늦게 와서 죄송해요" 눈물
    "주민들 사이에서 분열·갈등 조장하는 자들 있다는 게 무섭더라"
    "강정마을·세월호 남의 일 아냐…행복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것"


    최미라(30)씨는 자신을 배우로 소개했다. 삶의 벼랑 끝에서 인연을 맺은 직업이어서 더욱 소중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최씨는 "한때 '나는 망했다'라는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적이 있다"고 전했다. 2009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하고 싶은 것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여러 일을 거치며 달려 온 뒤였단다.

    "주변에서 저를 안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죠. 이미 나이는 먹었고, 결과물은 없다는…. 그 전까지 저는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제 자신이 무너지고 꿈이라는 말조차 역겹게 느껴지더군요."

    최씨를 수렁에서 건진 것은 2013년 10월 제주 강정마을을 여행한 경험이었다. 해군기지 건설을 두고 주민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반목하는 그곳에서 최씨는 국가권력 탓에 파괴된 공동체를 목격했다. 마을을 살리려는 주민들과 외지인들의 노력을 접하면서는 눈물을 흘렸고 희망도 봤다.

    "이러한 일들이 강정마을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에서 신문이나 뉴스로 접하는 것들의 이면을 현장에서 본 셈이죠.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을을 지키려는 분들의 노력을 봤으니까요. '세상에 나를 맞춰야 하나'라고 고민하던 시점에 '나 아니면 누가 나를 지키겠냐'라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도 됐죠."

    최씨가 특별한 여행을 통해 세상을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되고, 삶에 대한 용기를 되찾는 과정은 1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라클 여행기'(감독 허철)에 오롯이 담겼다. 실제로 만난 그 역시 '나'의 고통을 이겨내고 '우리'의 가치에 눈 뜬 분투하는 청년이었다.

    ▶ 영화 초반 "대학 졸업 후 4년간 백수로 지내고 있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 2009년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사 프리랜서 리포터로, TV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오고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일들이었기에 항상 불안했다. 그 불안감에 떠밀려 승무원 채용에 지원한 적도 있다.

    나중에 이력서를 쓰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경력으로 내세울 만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도 띄엄띄엄 하고, 돈을 모은 것도 아니고, 고정수입이 없으니까 신용카드도 못 만들더라. 그렇게 2012년에는 수 개월 동안 집에서 잠만 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돈도 없고 누구랑 만나서 이야기하기도 싫은 때였다. 졸업하면서는 몇 년 동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망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10월 17일 제주행 배를 탈 때까지 그랬다.

    ▶ '나는 망했다'라는 절망감이라….

    = 극한에 달했던 게 2012년이다. 그땐 더 이상 아무런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미용실을 갔는데, 그곳 언니로부터 "원형 탈모가 생겼다"는 말을 들엇다. 그 부위를 보고는 깜짝 놀랐는데, 저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놈의 꿈이 뭐라고 스스로를 이렇게 혹사시키나'라는 자괴감이 몰려 왔다.

    제가 첫째인데, 집에서 부모님의 기대도 무너졌다. 제가 하는 일을 부모님께 일일이 말씀드리는 성격은 아니다. 졸업한 뒤부터는 경제적으로도 부모님 도움을 안 받았다. 돈을 벌었을 때는 나름 여유롭게 지냈지만, 일 없이 공백이 길어지면 한 달에 10만 원으로도 생활했다.

    부모님이 뭐라 하실 땐 차라리 나았는데, 아무 말도 안하시니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동생에게도 미안하고…. 그 전에는 '어딘가 가고 있는 과정, 쌓이는 과정'이라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 저를 안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주변의 시선을 알게 됐다. 그걸 인지하고 나니까 더 힘들더라.

     

    ▶ 왜 배우의 길로 들어섰나.

    = 제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2학년 마치고 교환학생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온 뒤로는 언론사에 들어갈 마음을 먹고 언론학 위주로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학기에 사춘기가 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나는 왜 이걸 해 왔지?'라는 의문이 들면서 대학 입학할 당시가 떠오르더라.

    저는 원래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다가 "연영과 출신 아니어도 배우하는 사람이 많으니, 전공은 다른 걸 하고 졸업해도 하고 싶으면 배우를 하는 게 어떠냐"는 부모님 의견에 따랐다. 대학생활 내내 그때 일을 잊고 있다가 막바지에 떠오른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학기에 취업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졸업하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배우였으니, 아마추어 뮤지컬 극단에 들어가 매일 10시간씩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열정에 불탔는데,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보니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 이후 다른 일을 찾은 건가.

    = 언론고시를 준비하려는데, 제 자신이 너무 무식하게 느껴지더라. 대학 때 철학동아리도 들고 노력한 편인데, 사회에 딱 떨어져 보니 전공인 경제·경영 분야 빼고는 준비 없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10년 12월부터 2012년 9월까지 2년 가까이 한 지상파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의 시민논객, 보조 작가, 전화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하루 종일 뉴스를 보고, 매주 생방송 현장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후 리포터를 했던 경험 등을 살려 영화제 사회, 뮤지컬 프레스콜, 애니메이션 더빙, 내레이션 등 다양한 경험을 했고, 몇 차례 아나운서·기자 시험을 준비했지만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그 와중에 2010년 말 집이 있는 경기 고양시 일산에 연기학원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오디션을 봤는데, 1위를 했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연기자 동료들을 사귀었고 드라마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 오디션도 많이 봤다.

    ▶ 그러던 중 극한의 절망감에 휩싸였다는 말인데, 영화 미라클 여행기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 2012년 9월 자괴감이 극에 달했을 때 이 영화를 연출하신 허철 감독님을 만났다. 그날 잡혀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 했는데, 같이 만나기로 했던 언니가 설득해 자리에 나갔고 그곳에서 감독님을 뵀다.

    사실 감독님과는 구면이었다. 대학을 다니던 2007년 9월 교수와 제자 사이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저는 조용히 수업만 듣고 사라지는 학생이었는데, 항상 웃으면서 수업하시던 감독님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당시 수업 시간에도 영화 연출을 준비한다는 말을 하셨고 이후 주변에서 몇 차례 소식도 들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그로부터 딱 5년 만에 재회한 건데, 처음에는 못 알아보시더라. 소개를 하고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혼자서 힘들겠다"며 위로해 주시더라. "너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겠다"고 처음으로 말해 주신 분도 감독님이다. 삶의 멘토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고 감독님이 고양시의 지원으로 사무실을 일산 쪽에 잡으신 것을 계기로 단편 다큐멘터리 작업에 3개월간 참여했다.

    그 일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책을 모아 제주 강정마을에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분들이 감독님에게 "제주행 배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한 시간짜리 강의를 해 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해 오셨다. 이에 감독님은 "책을 모아 전달하는 이들의 마음, 책을 받는 주민들의 마음이 궁금하다"며 그 프로젝트를 다큐로 만드실 마음을 먹으셨고, 저 역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여서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2013년 10월 17일 제주행 배에 오르는 것에서 우리 영화는 시작된다. 감독님도, 저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 영화 얘기를 해보자. 극중 세 번의 눈물을 흘리더라.

    = 첫 번째가 제주행 배 안에서였다. 사실 배를 타기 직전까지 저에 대한 안타까움의 이면에 분노가 있었다. 배 위에서 가수 손병휘씨가 노래 '강물은 똑바로 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바다로 흐른다'를 부르는 걸 들으면서 울컥했다. 노래 가사 중에 "똑바로 가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멈추지는 않았어"라는 부분에서였다. 저 역시 그렇게 멈추지 않고 왔는데, 시간은 이만큼 지났는데 어디로 가야하지라는 마음이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 명문대(고려대)를 나왔고,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토익점수도 만들 만큼 만들었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삶이 싫어 여기까지 왔는데 '스스로 굉장한 능력치와 운을 타고난 사람이라고만 여겼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저 자신에 대한 미안함, 엉뚱한 말일 수도 있는데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다. 저 자신이 안타까우면서도 미웠다.

    영화 '미라클 여행기'의 한 장면. 제주 강정마을을 찾은 최미라씨가 해군기지 건설 현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인 높다란 망루에 올라가 있다. (사진=미라클필름 제공)

     

    ▶ 두 번째와 세 번째 눈물을 보인 것은 강정마을에서다.

    = 책을 전달하러 마을에 도착했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이 무장한 경찰들이었다. '내가 여기 왜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후 사이렌 소리를 듣고 가보니 미사를 드리려는 신부님을 경찰이 막고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런 현장은 태어나서 처음 접했다. 그날 카메라가 있어서 경찰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못 댔지만, 평소에는 그냥 들어서 다른 데로 옮긴다고 들었다.

    '뉴스에서 해군기지 찬성, 반대가 있다고만 들었는데, 나는 너무 모르고 왔구나' '잠깐 겪었을 뿐인데, 이곳에서 농사 짓는 주민들은 7년 동안 매일 보시면서 얼마나 힘드실까'라는 생각과 함께 당혹감과 죄송함이 밀려왔고, 펑펑 울었다.

    마지막 눈물을 흘린 건 한 여자 주민 분의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여러 주민들과 인터뷰를 한 뒤였는데, '나올 얘기 다 나온 것 같은데'라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분 앞에 앉았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 농성을 하시면서 삭발을 하셔서 머리가 짧은 여자 주민 분이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시는데,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이 나더라. "우리는 너무 울어서 눈물이 다 말랐다"는 그분의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 해군기지 건설 문제 탓에 부모자식, 형제 사이에도 금이 간 파괴된 공동체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 그 점이 신문, 방송에서 텍스트로 접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의 저 역시 강정마을 주민들의 아픔을 1%도 모를 거라 생각한다. 눈으로 보고 들었지만 아직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함께 자란 형제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부모님 제사 때도 모이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은 길에서 서로 인사도 하지 않는다. 인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음해하는 자들이 있어서란다. 그 주민이 남녀면 불륜, 동성이면 반대에서 찬성으로 생각을 바꿨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린다고 들었다. 그렇게 감시받는 상황에서 누가 서로 인사를 주고받겠나.

    그런 식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자들이 있다는 게 무섭게 느껴지더라. 일을 벌인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 찢겨진 관계의 상처는 오로지 현장에 남겨진 주민들의 몫이다.

    ▶ 강정마을의 현실이 모순 가득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도 들더라.

    =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힘 없는 사람들이 당하고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이러한 부조리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 일단 "왜 그렇게 됐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는 질문을 배제한 채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저 역시 학교에서 그런 것을 겪으면서 자랐다. 제 부모님은 자식을 틀에 맞춰 키우시지 않으셔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심심했던 기억이 많다. 그때 '나는 누구일까'라는 고민을 했으면 지금 이렇게 마음 고생이 크지도 않았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후배들은 '잘 살고 있는 건지' '하고 싶은 게 뭔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길 바란다.

    ▶ 이후에 마을을 다시 찾은 적이 있는지.

    = 지난해 12월 초에 주민들께 미라클 여행기를 보여 드리려고 다시 찾았다. 그날 마을 안에 군관사 짓는 것을 막기 위해 농성을 하고 계신 주민 분들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농성 중인 분들은 천막 안에서 먹고 주무시고 하셨는데, 너무 지쳐 계셨다. 시사회에도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셔서 상영 전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강정마을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미라씨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어려움을 감수하고 영화로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친구들을 많이 봐 왔다"며 "이들은 우리 사회 약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연출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윤성호 기자)

     

    ▶ 강정마을을 다녀온 뒤 무엇이 달라졌나.

    = 예전의 저에게는 사회 이슈도 알아둬야 할 것 같은 하나의 콘텐츠로 머물렀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굉장히 슬펐다. TV 드라마·예능에서는 상류층의 안락한 삶만 비추는데 현실에는 빈곤한 삶이 넘쳐난다. 저 역시 TV 속 삶을 사는 이가 아니기에 분노가 생겼다. '열심히 사는데 안 된다'고 내 탓도, 세상 탓도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피상적인 것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했고, 주변 부조리한 일을 보며 '내 코가 석자'라고 외면했다.

    강정마을을 다녀온 뒤로도 확연히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더 제대로, 거침없이 치열하게 막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제 또래를 보면 감성적이고 따뜻한 면들이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러한 면을 감추고 차갑게, 뾰족하게 살아야만 기회가 주어진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 저 역시 친구가 잘 되는 걸 보면 부럽고 얄미울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힘들게 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려 애쓴다. '너도 열심히 살고 있지' '함께 열심히 살아가자'라는 느낌으로 친구들을 만나면 분야는 달라도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 점이 저에게는 커다란 힘이 된다.

    지금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소중하다. 언젠가 우리가 뭔가를 함께 도모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때까지 저는 제 위치에서 열심히 살 생각이다. 10년, 20년 뒤 우리와 자식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어야 하니까.

    ▶ 주변 또래 청년들의 삶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 중에는 한국에 없는 애들이 많다. 애초부터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 걸 알고 다른 나라로 피한 것이다. 그 친구들은 캐나다 일본 호주 등지에서 고등학교, 대학을 나와 현지에 정착해 살고 있다.

    주변의 대학 때 친구나, 연기자 동료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면 누가 결혼한다는 말에 "좋겠다. 결혼도 하고…"라는 반응을 자연스레 보인다. 돈이 없으니 결혼도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학벌·스펙에 상관없이 다들 그렇다.

    직장에 들어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힘들다는 반응 일색이다. 뭐가 힘든지는 말을 못하는데, 하여튼 힘들다고 푸념한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기도 해서 그만두는 사람도 많이 봤다.

    우리 세대는 '뭔가를 뒤집을 수 있는 세대는 아니'라는 인식이 뿌리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제도권 안의 조직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야인처럼 개인의 삶을 황무지에서 개척하거나,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거나 한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사는 거다.

    "걔는 집안이 좋잖아" "쟤는 돈이 많잖아"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분노의 대상이 된 친구들 역시 살면서 수많은 고민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 말이다.

    ▶ 흔히들 말하는 중산층 집안에서 나고 자랐나.

    =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러니까 외환위기 직전이었는데 집안이 어려워졌다. 어머니도 일을 하셨지만, 저는 고생을 안했다. 부모님이 다 해 주셨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못해 본 기억은 없다. 대학 때 등록금 내본 적도, 미국 연수 때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없다.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제가 잘 산다고 생각했다. 진짜 철없이 살던 때다. (웃음)

    저는 스스로 긍지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 덕에 심한 비행에 빠지지 않아 왔지만, 대학 졸업 후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그 긍지조차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는 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리면서 훨씬 견고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몰랐을 때는 해맑게 살았는데, 그것을 알고 난 뒤로는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런 시선을 갖게 된 게 너무 다행이다.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길을 걸었다면 조급했을 텐데, 다행히 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감사하고 소중한 이유다.

    ▶ 자신과 세상에 대해 품었던 분노는 지금 어떤가.

    = 분노해야 할 정확한 대상이 무엇인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분노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다. 여성에게 불친절한 택시기사, 아이를 학대하는 자격 없는 교사, 자식에게 손찌검하는 부모, 동물을 학대하는 자 등등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 안에도 있다. 저라는 개인이 뭔가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부조리한 것들에 대한 분노는 항상 갖고 행동하며 살 것이다.

    정의의 투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저는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맞설 생각이다. 그 행복의 가치를 지금도 찾고 있지만, 평생 좋아할 직업과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못 찾을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할 말은 하면서 살아 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해야 할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영화 '미라클 여행기'의 한 장면. 최미라씨가 제주 강정마을의 한 주민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얻은 선인장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고 있다. (사진=미라클필름 제공)

     

    ▶ 공교롭게도 극중 등장하는 제주행 배가 세월호다. 4·16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어떤 심정이었나.

    = 지난해 4월 16일 오후 12시쯤 배에 문제가 생겼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탑승객들이 당연히 구조될 것이라고 여겼다. 말 그대로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구조가 안 되고, 이미 배 안의 사람들이 살아 있을 수 없는 상황과 대면했을 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꺼이꺼이 우는 때가 대부분이었다.

    계속 뉴스를 확인하는 와중에 우리가 세월호에 탔을 때 봤던 종업원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모두 생각났다. 우리는 희망을 싣고 제주로 간 배가 절망이 된 것이다. 강정마을에서 공동체의 몰락을 목격했다면,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는 국가의 몰락을 봤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는 대중의 무서운 모습도 경험했다. 제가 응원차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 농성장에 간다는 말을 들은 누군가는 사람으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개인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갖도록 조장하는 세력이 무서운 것 같다.

    ▶ 강정마을 사태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지금의 그대는 어떤가.

    =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누구나 그런 입장에 처할 수 있다는 것. 영화 미라클 여행기가 평범하지 않은 운명을 타고난 것만 봐도 그렇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측의 요구로 예고편에 나오는 세월호 표기에 블러처리를 한 일이 결국 언론에 알려졌다. 멀티플렉스 CGV 측에서도 처음에는 허철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상영관을 열어주겠다고 했는데, 언론시사 바로 직전에 연락을 해 대관할 수 없다고 했다. 상영관 문제도 연락이 없다가 서울 압구정점과 부산 서면점 두 곳만 하는 걸로 결정을 내리더라. 직전까지 '어디에 걸까'라는 행복한 고만에 빠져 있었는데 말이다.

    이 모두가 개봉 이틀 전부터 벌어진 일이다. 지금도 우리 영화가 지닌 진정성을 믿기에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얇고 길게 3월까지 극장 상영을 끌고 갈 계획이다.

    ▶ 한 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 배우는 결국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 선택이 언제 이뤄질지 알 수 없다. 배우를 꿈꿔 온 저 역시 감수해야 할 일이다. 다만 선택과 선택 사이 공백기에 할 일이 너무 많다. 연기를 하는 목적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 세계관을 넓혀야 하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 속 인물을 읽고, 좋은 이야기를 연기로 전달할 수 있으려면 결국 제가 많은 걸 알아야 한다. 여기에 공감대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경험과 감성은 필수다. 모든 것들이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 분야다. 다른 이들의 삶을 느끼고 알아가면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배우로 살아가겠다.

    솔직히 저는 힘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싶다. 그러려면 평탄하지 않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바람이 크다. 그들의 삶이 진심으로 궁금하고, 깊이 이해하고 싶다.

    ▶ 또래 청년들을 위한 응원 한마디.

    = 지금 우리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아는 입장에서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들 각자의 삶에서 힘든 것을 감당하고 있지 않나.

    다만 우리 영화에 등장하는, 뜻하지 않게 얻은 소중한 선인장처럼 각자 마음의 선인장에 빨간 꽃을 피우는 순간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것을 꿈이라고 말하기는 싫고, 욕망이라 부르고 싶다. 어쩌면 삶은 끊임없이 문을 열어젖히며 욕망을 이뤄가는 게 아닐까.

    강정마을에서 대가 없이 일하는 분들을 만났다. 외지인으로 마을에 잠시 왔다가 "잊히지 않아서 다시 찾았다"는 분들이다.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일정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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