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이뻐 죽겠능거' 전자랜드 전 주장 이현호(오른쪽)가 13일 SK와 6강 플레이오프를 3연승을 마치고 진행된 인터뷰 뒤 현 주장 리카르도 포웰에게 뽀뽀를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에 포웰이 웃으면서 질겁하며 피하고 있는 모습.(인천=임종률 기자)
전자랜드의 전·현 주장이 경기를 끝냈습니다. 한국 프로농구 역사를 새로 쓴 둘의 우정어린 하모니가 연출한 대역전 드라마였습니다.
전자랜드는 13일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14-2015 KCC 프로농구' SK와 6강 플레이오프(PO) 3차전에서 연장 끝에 91-88,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역대 프로농구 PO에서 6위 팀의 사상 첫 3연승의 쾌거였습니다.
사실 전력에서 SK의 우세가 예상됐던 PO였습니다. 정규리그 3위인 데다 신장에서 전자랜드보다 월등했습니다. 코트니 심스(206cm), 김민수, 최부경(이상 200cm), 박승리(198cm), 박상오(196cm) 등 장신들이 즐비했습니다.
하지만 이긴 것은 전자랜드였습니다. 마지막 3차전에서 주역은 현 주장 리카르도 포웰(34 · 196cm), 주연보다 어쩌면 더 값졌던 조연은 전 주장 이현호(35 · 192cm)였습니다. SK의 자랑인 장신 포워드보다 하나도 클 게 없는 선수들이지만 골밑을 휘저었습니다.
포웰은 팀내 최다 27점에 9리바운드 9도움의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펼쳤고, 이현호는 알토란 같은 17점에 4리바운드 3도움의 쏠쏠한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전자랜드가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요?
'주장이면 상대보다 작아도 버텨낸다' 전자랜드 현 주장 포웰(15번)과 전 주장 이현호(14번)가 13일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상대 최부경과 박상오를 밀어내며 리바운드를 따내기 위해 공을 보고 있는 모습.(인천=KBL)
특히 둘은 3쿼터 찰떡 호흡이 빛났습니다. 하이-로 게임을 펼치며 상대 지역방어를 허물었습니다. 포웰이 위에서 패스하면 이현호가 냉큼 받아먹었습니다. 이현호는 3쿼터만 12점을 몰아넣어 역전승의 발판을 톡톡히 놨습니다.
경기 후에도 둘은 진한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기자회견실에 차바위(15점)와 함께 들어온 둘은 티격태격했습니다.
감격의 승리가 확정된 뒤 포웰은 팬들의 환호에 답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설핏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한 질문에 나오자 포웰은 "왓(What)?"이라며 시치미를 뗐습니다. 옆에 있던 이현호가 "너 걸(girl)이잖아"(여자처럼 울었다는 뜻)라며 놀려댔죠.
이현호는 포웰과 보인 3쿼터 호흡에 대해 "상대가 포웰을 막지 못해 지역방어를 섰다"면서 "원래 포웰과 많이 훈련했던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하프타임 때 얘기를 많이 했는데 포웰이 잘 먹여줬다"고 웃었습니다.
'전자랜드 팬들, 영원히 기억할게요' 포웰이 13일 SK와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승리한 뒤 자신의 휴대전화에 팬들과 함께 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은 전자랜드 조건희 대리.(인천=KBL)
사실 이현호는 포웰 이전 주장입니다. 포웰이 지난 시즌 프로농구 사상 두 번째 외국인 주장을 맡기 전 캡틴이 그였습니다. 그런 이현호가 보는 '포 주장'은 어떨까요?
이현호는 일단 "주장 역할을 잘 한다"고 운을 뗐습니다. 그러나 "미울 때도 있다"고 고자질합니다. 너무 승부욕이 강해 질 때면 불같이 화를 내 팀 분위기를 자칫 망칠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곧바로 칭찬 일색. 이현호는 "경기 시작 전에 다같이 어깨동무하고 한 형제처럼 지낼 수 있게 하는데 외국인이 그러기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경기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그런 게 중요하다"면서 "가족보다 더 우리와 많이 접하고 챙겨준다"고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포웰도 "지금이 내 농구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이어 "경기 후 구단주께서 라커룸에 와서 '어린 선수 이끌고 온 모습 감사한다'고 했는데 차바위, 김지완 등 선수들을 신인 때부터 만났다"면서 "전자랜드는 이들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팀이었다"며 뿌듯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나 떠나기 싫어요' 포웰이 13일 SK와 6강 플레이오프 승리 뒤 기자회견에서 내년 시즌 팀을 떠나야 하는 심경을 밝히자 이현호가 심각한 표정을 듣고 있다.(인천=임종률 기자)
하지만 포웰은 다음 시즌 정든 전자랜드를 떠나야 합니다. 외국인 선수 규정에 따라 제한된 3시즌을 모두 뛰었습니다. 포웰은 "그래서 더 아쉽다"고 합니다.
이현호는 그러나 쿨하게 넘깁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현호는 "포웰이 다른 팀에 가면 내가 막을 텐데 상대하기 쉽다"고 도발했습니다. 이에 포웰이 "그러면 내가 50점을 넣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그렇다면 누가 더 주장 역할을 잘 했을까요?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은 "이현호는 포웰을 잘 이용할 줄 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포웰을 이현호가 잘 구슬린다는 겁니다. 일단 전 주장이자 현 플레잉코치가 한 수 위인 셈이 아닐까요?
이날은 서양에서 꺼리는 '13일의 금요일'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나오자 포웰은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일축했습니다. 옆에 있던 이현호는 "오늘이 포웰 딸의 첫 번째 생일"이라고 귀띔합니다. 미신을 개의치 않는다지만 다행히(?) 13일의 금요일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현지 시각으로는 12일이기 때문입니다.
구단 역사상 최고의 경기를 펼치고 있는 전자랜드. 그 중심에는 과거와 현재의 주장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영화의 대사가 절로 떠오릅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100달러가 아깝지 않을 사진' 전자랜드 현 주장 포웰(왼쪽)과 전 주장 이현호가 13일 SK와 6강 플레이오프 3차전 뒤 우정어린 포즈를 취한 모습.(인천=임종률 기자)
p.s-인터뷰를 마친 뒤 둘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포웰은 "100달러를 내야 한다"고 짐짓 튕기더군요. 지금 현금이 없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어르고 달래서(?) 찍었습니다.(물론 포웰의 농담이지요.)
경험이 많은 전 주장 이현호는 친절하게 기자를 위해 뽀뽀를 하는 포즈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포웰은 질겁을 하며 물러납니다. 둘의 접촉(?)은 없었지만 뜨거운 우정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부 색이 달라도 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문경은 SK 감독은 경기 후 "전자랜드는 진짜 팀다운 팀"이라고 부러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