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분데스리가 평정한 사람이야." 차범근의 레버쿠젠 시절 모습. (자료사진=분데스리가 홈페이지)
[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90년대 문화가 시작된 1990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차범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나이에 따라 독일 분데스리가를 평정한 선수 차범근을 떠올릴 수도, 울산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수원 감독을 거친 지도자 차범근을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물론 차두리 아버지로 생각할 수도 있겠죠.
지금부터는 선수 차범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에 진출한 차범근은 1989년 6월18일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11월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오는데요.
25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90년 3월26일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 됩니다.
물론 은퇴 번복은 아닙니다. 바로 동독 드레스덴에서 열린 동서독 연합팀과 세계올스타의 국제자선축구대회였습니다. 당시 대회는 동독 드레스덴시의 재건 기금 모금을 위해 열렸고, 이미 은퇴를 한 차범근도 세계올스타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차범근의 활약을 보면 세계올스타로 뽑힐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1978년 12월 다름슈타트에 입단한 차범근은 군 문제로 다시 귀국했는데요. 2년 뒤 전역을 약속 받고 독일로 향했지만, 공군이 입장을 바꾸는 바람에 1경기만 뛰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결국 1979년 5월31일 만기 전역한 뒤 7월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생활을 시작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아니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198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UEFA컵을 들어올렸고, 1988년에는 레버쿠젠 소속으로 다시 한 번 UEFA컵 정상에 올랐습니다. 1989년 은퇴하기까지 분데스리가 308경기에서 98골을 넣었는데요. 1999년 스테판 사퓌자(스위스)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 득점이었습니다. 컵대회나 UEFA컵을 합치면 총 372경기 121골이 차범근이 남긴 업적입니다.
키커지 표지를 장식했던 차범근.
두 차례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고, 1989년에는 키커가 선정한 80년대 분데스리가 최고 외국인 선수로도 뽑혔습니다. 2013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구단 레전드 베스트 11에도 선정됐습니다. 말 그대로 분데스리가의 전실이었습니다. 심지어 10년을 뛰면서 옐로카드가 단 1장이었으니, 경기력도 매너도 최고였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차범근의 활약이 눈부신 경기였습니다.
차범근은 바비 무어(영국), 자일징요, 지코(이상 브라질), 마리오 켐페스(아르헨티나), 쌍둥이였던 케르코프 형제(네덜란드) 등과 함께 세계올스타 소속으로 출전했는데요. 동서독 연합에는 프란츠 베켄바워를 비롯해 칼 하인츠 루메니게 등이 호흡을 맞췄습니다.
크라이쉐의 선제골로 동서독 연합이 앞서가던 후반 차범근이 연속 골을 넣어 경기를 뒤집습니다. 결국 지레세의 쐐기골까지 터지면서 세계올스타가 3-1로 승리하게 됩니다. 물론 자선대회인 만큼 골에 큰 의미는 없지만, 차범근의 이름값을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차범근은 독일의 축구 선수들에게도 영웅이었습니다.
미하엘 발락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 출전했을 때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너무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올리버 칸 역시 2004년 친선경기를 위해 방한 후 차범근을 만나 "당신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큰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