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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배운 교과서의 문인들은 죄다 친일파였다"

책/학술

    "학교 다닐 때 배운 교과서의 문인들은 죄다 친일파였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102]우리 민족의 암적 존재 '친일파'를 처음 해부한 임종국

     

    일본제국주의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43년 8월, 조선의 문인들마저 너도나도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청년들에게 징병에 나가라고 독려했다. 그 유명한 시인 노천명의 시를 보면 일본을 위해 총을 잡는 것이 '귀한 부르심'이다.

    이런 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든 문학상까지 있다니 제 정신을 가진 나라일까? 다른 시를 읽어보자.

    "장하구나, 학도 출진 / 그대들, 가서 / 이제, 맞이하는, 12월 8일 / 반석의 기초는 구축되고 / 그대들이, 미소하는, 전장을 생각하며 / 나는, 지금 질풍과 같이 / 도의의 날개를 퍼덕이면서 / 포연 속을 치달리는 / 그대들, 학병의 영자를 본다" (조우식 <학병 출진하다="">에서)

    이번에는 교과서에 수필이 실렸던 김소운의 글을 읽어보자.

    "오늘부터는 해 떠오르는 나라의 수호신이옵신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 아아 이 이름! 1억 함께 복을 입으며 지금 이 시간 새로운 결의를 가슴에 새기오리다." (김소운 <야마모토 이소로쿠="" 원수="" 국장일="">에서)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을 추모하는 글이다. 저 이름 대신에 '이순신 장군'이 들어가면 딱 맞는 시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모교인 성남중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이 학교의 설립자라는 김석원 장군의 동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김 장군은 당시 세상이 다 아는 친일 군인이었다. 문제는 그 동상 뒤에 새겨진 글들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김석원 장군은 먼 후일의 조국과 민족을 진작 내다보시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독립 대한의 육군 소장으로 어두운 겨레에 빛을 주신 분으로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자' 굳은 이념 아래…"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봐도 독립군의 한 분이다. 실제 그럴까?

     

    1939년 3월, 뼈속까지 친일파인 일본군 소좌 김석원은 개선장군이 되어 귀환했다. 화려하게 귀환한 그에게 조선청년을 전장에 부르는 '전국순회강연'이라는 일거리가 준비돼 있었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침략전쟁이 점점 더 확대되자 학도병 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20대 안팎의 청년 학생들이 죽음의 전선으로 뛰어들도록 각계지도층 인사들이 충동질했다.

    그 대표적인 학병 권유 강연회의 하나가 1943년 11월 9일 서울 부민관에서 개최된 <군인 선배들="">의 특강이었다. 이 자리에서 열변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일본군 소속 장교가 바로 김석원이었다.

    김석원은 외쳤다.

    "용약! 군문에 진입하라. 홍대무변(鴻大無邊)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은 성스런 싸움터에 나가 죽을 각오로 영, 미 귀축의 적을 때려잡는 데 있다"

    '이런 취지의 강도 높은 열변이 히틀러식으로 한두 마디 웅장하게 발성될 때마다 박수가 연발 터져 나왔다. 진짜 순도 높은 황군의 최선두답다. 반 시간 남짓의 열변이 토해지는 동안 청중들의 박수가 10여 차례나 장내를 진동시켰다.'

    일제의 어용신문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자에 이처럼 반 페이지나 특보로 보도할 정도이니, 가히 경탄할 만한 노릇이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대한민국 군대의 사단장이 되고 중고등학교 사립학교 이사장이 되어 동상까지 남겼다니…

    다행히 문제의 동상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2003년 2월 어디론가 이전해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이래 문인이건 군인이건 경찰이건 교육계건 도처에 친일파들이 발호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느 한 분의 용기어린 고독한 집필이 이 어두운 과거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그가 바로 임종국이다.

    ◇ "우리는 반드시 20년 후에 돌아온다"

    패퇴한 일본군 패잔병들. 마음 속에는 조선을 다시 갖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안고 돌아갔다.

     

    1945년 8월 말 일본이 패망하고 아직 미군이 진주하지 않은 경성공립농업학교 교정. 무장해제가 안된 일본군이 이 학교 교정과 강당에 10일 정도 머물렀다. 연못에서 일본군이 총질을 하면서 고기를 잡는 광경이 신기했던 이 학교 졸업생 임종국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한 일본군 병사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 순간 일본군 병사가 마치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임종국은 얼른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당신네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병사는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 뱉듯이 그에게 말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협정을 체결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렇게 해서 35년간 한민족의 식민지 전락으로 인한 모든 아픔은 8억 달러의 돈으로 팔려 나갔다.

    청년 임종국은 그 광경을 보면서 결심했다.

    "이렇게 되면 물밀듯이 일본은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 제2의 송병준이, 제2의 박춘금이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친일파들이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문학도였던 임종국은 방향을 바꿔 '친일문학론'을 쓰기 시작했다.

    ‘친일파’ 연구의 문을 연 임종국 선생과 그의 유고.

     

    '친일문학론'은 친일문인의 죄상을 만천하에 공개한 최초의 저서이다. 신소설의 개척자라고 교과서에 나온 이인직부터 2인 문단시대를 열었다는 최남선과 이광수를 거쳐 소설 미학의 정점을 보인 김동인, 좌파 카프 문학의 맹장이라는 임화, 북방정서의 서사시인이라는 김동환, 민족정서의 총화라는 서정주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단의 대가들이 어떤 친일작품을 남겼는지를 소상하게 밝혔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문인협회를 이끌었고, 이 '문협'이 공식적인 문인 대표기관이었던 그 시대에 이 책의 출간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임종국은 신념을 갖고 문학뿐만 아나라 다양한 분야로 친일파 연구의 영역을 넓혀 갔다. 그가 쓴 저서의 목록을 보자.

    <정신대> 일월서각. 1981
    <밤의 일제="" 침략사=""> 한빛문화사. 1984
    <일제하의 사상="" 탄압=""> 평화출판사. 1986
    <친일논설선집> 실천문학사. 1987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일월서각. 1988
    '제1공화국과 친일파',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81
    '일제하 지식인의 변절', <월간조선> 80. 06
    '이광수의 비극과 원천', <한국인> 85. 03
    '친일파의 화려한 변신', <순국> 89. 5·6

    이상 80여편이다.

    임종국이 대표적인 친일 작가로 든 문인들의 명단을 보자.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량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팔봉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백철 △유진오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효석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최정희

    내가 학창시절에 교과서나 '한국문학전집'에서 읽은 작가를 총망라한 것 같다. 이들은 해방 후 반성이나 참회 없이 한국 문단을 이끌게 된다. 이들 저서를 출간하면서 참 씁쓸한 후일담이 많다.

    임종국이 '친일문학론'을 낼 무렵 이 책에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가 포함된다는 소문을 듣고 조용만(문학평론가, 전 고려대 교수)이 찾아왔다. 그는 "나는 그 책에 들어가도 좋으니 유진오 총장은 좀 빼달라"고 부탁했다. 임종국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책에는 조용만은 물론 유진오까지 버젓하게 나온다.

    조용만이 이렇게 로비에 나선 것은 고려대 교수 임용 때 유진오 총장에게 신세를 져서 그랬다고 한다. 우리나라 학계의 어두운 뒷이야기다.

    채명신 장군(가운데)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7월 20일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했다. 사진은 베트남전 종합보고를 받은 뒤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채 장군에게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모습이다.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 무렵의 일이다. 어느 중년 부인이 임종국이 쓴 책에 등장하는 친일인사의 후손이라며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임종국은 그 인물의 친일 행적을 입증하는 자료를 몽땅 들고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그 곳에는 한 중년부인이 나왔는데 남편이 동행을 했다. 어깨에 별 셋(중장)을 단 전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 장군이었다. 중년 부인은 자신은 할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서 책에 쓴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를 보여 달라고 했다. 자료를 다 읽은 부부는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중년 부인은 경북 영덕의 거부 출신인 친일파 문명기(1878~1968)의 손녀 문 아무개였다. 문명기는 제지업을 시작으로 금광에 손을 대 큰 돈을 번 인물이다.

    그는 1935년 육군과 해군 비행기 각 1대씩을 사라고 조선총독부에 거금 10만 원을 헌납한 이후 일제로부터 '애국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더 나아가 '1군 1대 헌납운동'을 벌이는 등 친일 행각을 노골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북도 의원, 중추원 참의 자리까지 받았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에는 비행기로는 부족했던지 군함 헌납운동을 제창하고 자신이 소유한 동광산 3개까지 기부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처단되지 못하고 천수까지 누리고, 후손들은 '훌륭한 조상'이라고 믿고 살았으니…

    ◇ 필생의 역작 '친일파총사' 발간을 못하고 환갑 나이에 서거하다

    말년에 천안시내 구성동에 살던 시절 임종국의 모습. 가깝게 지내던 <중앙일보> 이근성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임종국은 말년에 폐기종이 악화돼 한 걸음 떼고 숨을 한번 쉬어야만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그래도 그는 후학들과 함께 방대한 규모의 '친일파총사' 집필에 착수했다.

    총 10개 분야(총론, 사상, 경제, 만주·중국, 문화, 동양종교, 서양종교, 사회교육, 정치, 1~4공화국)를 다루는 작업이다. 임종국은 1만 5,000명 분의 친일인명 카드를 작성해 두었으니 그걸로 11권째인 인명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임종국은 이 저서들을 집필하던 중 1989년 11월 12일 만 60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임종국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저서, 방대한 자료는 후학들에게 넘어갔다.

    고인의 유업을 잇기 위해 임종국 서거 2년 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는 임종국이 남긴 자료를 토대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친일파 후손들과 친일 국회의원들의 노골적인 방해 속에서도 꾸준히 진행됐다.

    2004년 1월에는 부족한 제작비를 모으기 위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네티즌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이 모금운동은 11일만에 목표액인 5억원의 제작비를 민족문제연구소에 안겨줬다. 최종적으로 7억원이 걷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2권 106~107쪽에 만주군 중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 항목이 실려있다.

     

    이렇게 해서 4,389명의 친일파들의 행각을 자세히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이 2009년 11월 8일 마침내 발간됐다. 고 임종국 선생이 1966년 '친일문학론'을 통해 친일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후 43년만의 일이다.

    총 3권, 3천 페이지에 달하는 인명사전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성수 전 부통령, 장면 전 국무총리,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안익태·홍난파, 언론인 장지연, 소설가 김동인 등 유명 인사들의 죄상이 망라돼 있다. 이렇게 해서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못했지만, 역사적 단죄의 첫 단추를 꿴 셈이다.

    임종국 선생은 말년에 이런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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