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에서 작품 표절 논란은 이따금 터져 나오는 문제지만 신경숙 표절 논란은 이전의 논쟁과 질적으로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 대표 소설가로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린 신씨가 다른 사람 작품을 따라 썼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주는 충격이 인터넷의 파급력, 그리고 켜켜이 묻어 있던 문인들의 '문학 권력'에 대한 반감을 만나 폭발력을 일으켰다.
문예지를 운영하는 대형 출판사의 감시자 역할에 소홀한 문학 비평, 문학상·등단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젊은 작가와 평론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문학계의 '세대교체'까지 예고했다.
◇ 소설가가 기고하고 SNS로 확산…15년 전과 달랐다
신씨가 '전설'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지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문학평론가 정문순은 2000년 문예지에 실은 글에서 "'전설'은 명백히 일본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 '우국'의 표절작"이라며 두 작품이 "모티브부터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때 논란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신씨 역시 별다른 해명이나 사과 없이 넘어갔다.
반면 지난 6월 소설가 이응준씨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올린 기고문은 앞선 글과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보여줬다. 여기에는 이씨가 인터넷 매체를 활용한 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영향력이 한몫을 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정문순 평론가가 2000년 제기한 글은 정식 비평에 더 가까운 '점잖은 글'이었던 반면 이응준 소설가의 글은 다소 선정적이었다"며 "여기에 SNS의 영향력이 맞물려서 폭발력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소설가들의 권위가 약화하고 보다 친화적인 작가-독자 관계가 발전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최원식 문학평론가는 "작가들이 선구자이면서 지식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독자의 역할이 훨씬 커졌다"면서 "2000년대 이후 문학계에도 '소비자 시대'가 오고 작가-독자 관계가 뒤집히면서 작가에 대한 비판이 예전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런 영향력은 의혹의 당사자와 출판사가 '모른척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신씨는 이씨 기고가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출판사 창비를 통해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읽어본 적 없다는 입장을 내놨고,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자 1주일 후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신씨와 출판사를 향한 비판 또는 옹호의 의견도 SNS를 통해 활발하게 제기됐다.
그동안 문학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일부 평론가는 페이스북 등에 자기 생각을 담은 글을 올려 화제가 됐고 몇 명은 '대표 비판 평론가'로 이름이 붙어 계간지 좌담에도 초대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론이 다소 과열되면서 신씨와 대형 출판사에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권력이 주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온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평론가는 "작가가 부주의했던 부분이 있고 그 부주의가 용인된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 실수 이상으로 작가를 매도하거나 '문학 권력'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마녀사냥식 비판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 3대 출판사 엇갈린 대응…흔들리는 '철옹성'
신경숙 개인의 작가적 윤리 결여를 비판하던 대중의 눈초리는 금세 창비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등 국내 대형 문학 출판사로 옮겨 갔다.
앞서 수차례 표절 의혹이 있던 신씨가 해명하지 않고 넘어간 데는 스타 작가를 만들어 출판사의 상업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문학동네와 창비, 문학과지성사 등 출판사의 상찬 일색 비평을 동원한 비호가 있었다는 지적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세 출판사는 각각 다르게 대응했다.
문제의 작품 '전설'이 수록된 단편집 '감자 먹는 사람들'을 출간한 창비는 내부 조율 없이 입장을 밝혔다가 뭇매를 맞았고, 신씨 뜻에 따라 책 출고를 정지한 이후로는 침묵을 지켰다.
창비는 최근 출간된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고요를 깼다. 백영서 편집주간은 책머리에서 신씨 작품의 논란의 구절을 "의도적 베껴 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옹호 입장을 취했다.
백낙청 창비 편집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문제의 대목이) 의도적인 베껴쓰기, 곧 작가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등의 강한 옹호의 뜻을 수차례 밝히면서 비난받았다. 백 편집인은 지난 5월 창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올해 말쯤 창비 창립 50주년을 맞아 퇴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언급된다.
신씨의 작품을 가장 많이 출간한 문학동네의 조치는 사뭇 달랐다. 문학동네는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강태형 대표이사와 계간지 '문학동네' 1기 편집위원 6명이 물러나고, 새 편집위원진이 쇄신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서는 권희철 편집위원이 "'전설'은 '우국'의 표절"이라고 명백히 밝히면서 "문학동네 편집위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련의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사과했다.
이번 사태에서는 한 발 떨어져 있었지만 창비·문학동네 못지않게 '문학 권력'의 일부분으로 지적된 문학과지성사는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내·외부 평론가 5명이 참여한 '표절 사태 이후의 한국문학' 대담을 실었다.
◇ 젊은 작가 중심 활발한 토론…"한국 문학계 변화 조짐 보여"
신씨의 표절 논란이 불러일으킨 문학계 전반에 관한 논쟁에서는 젊은 작가들과 일부 문인·평론가들의 문학계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특히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문학상·등단 제도, 대형 출판사의 자사 출간작 위주 비평 등 문학계 폐쇄성의 원인으로 지목받는 요인을 이 기회에 타파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한국작가회의는 문화연대와 긴급 토론회를 열었고 '실천문학', '문학동네' 등 문학 계간지는 젊은 작가와 평론가가 참여하는 대담을 마련해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작가들은 하나같이 독자의 선호보다는 대형출판사 문학상 수상 여부를 위주로 돌아가는 출판사 분위기에 비판을 가했다.
영화화된 '소수의견'의 작가 손아람은 '실천문학' 가을호에 실린 대담에서 "현재 대한민국 거의 모든 작가 지망생은 작가가 되는 방법으로 공모전을 통과하는 것 외에 다른 방향의 길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아예 공모전과 문학상 제도를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배수아·백가흠·정용준이 편집위원을 맡아 지난 7월 창간한 소설 전문 문예·서평지 '악스트(Axt)'는 신씨 표절 논란이 점화되기 전부터 창간을 준비한 문예지다. 하지만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돼 오로지 소설 서평과 인터뷰만 담는 2천900원짜리 잡지는 출판사나 돈벌이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소설만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젊은 작가들의 열망이 투영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광렬 소설가는 "대형출판사의 문학상 등단 제도도 어떤 '라인'을 만드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등단 제도의 모순이 학연, 지연과도 연결돼 결국 작가가 저지른 실수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기 어렵게 된다"며 "이번 계기로 '어디 출신'끼리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분은 타파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