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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접시닦이가 연봉 1억을 달성하기까지

    [노컷 인터뷰]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지방대 출신 스물 일곱

    ‘접시닦이가 연봉 1억을 달성하기까지’. 기사 제목을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싫어할 거다. 고액 연봉자가 됐다는 게,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싫은 심정은 잘 알지만 그래도 어쩌랴, 처음 그의 소개를 들었을 때 이 제목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영어 한 마디도 못하던 지방대 출신 스물일곱 청년 김성준 씨(현재 32)는 어느 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떠났다. 호주에서 한 첫 일은 접시닦이였다. 그 나라 언어를 못하니 몸 쓰는 일을 하는 건 당연했다. (참고로 호주로 떠나기 한 달 전 그가 받은 토익 점수는 350점이었다.)

    그랬던 그가 1년 뒤에는 영어에 능숙해지고, 1년 뒤에는 연봉 1억 원의 대기업 슈퍼바이저가 됐다. 워킹홀리데이서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영어와 돈,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저자 김성준 씨가 CBS 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장소 협조 = 홍대 인근 'You are here' 카페)

     

    최근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냈다. 제목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책 띠지에도 ‘연봉 1억 원’을 강조하는 자극적인(?) 문구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책 많이 팔고 싶은 출판사 사장과 기사를 많이 봤으면 하는 기자의 마음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자꾸 연봉 1억을 언급하고 있지만(사실 그것만으로 대단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자가 그에게 꽂힌 것은 연봉이 아니다. 그를 만난 것은 어느 영어 수업에서였다. 그는 강사였고, 기자는 수강생이었다. 그가 첫 수업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기자의 귀에 꽂힌 단어는 두 번의 자살 시도였다. 삶을 포기하고 싶어 자살까지 시도했던 그가 어떻게 극복하고 일어났는지를 듣고 싶었다. 또 영어를 잘하게 된 비결도 매우 궁금했다.

    ◇ 아버지에게 학대 당했던 유년 시절

    김 씨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물으면 “좋은 기억이 없다”고 답한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다. 더욱이 어머니의 오랜 단짝 친구와 바람이 난 아버지는 재산을 다 갖고 가정을 버렸다.

    머리가 커가면서 일탈이 시작됐다. 중학생 시절 술과 담배에 빠졌다. 세상을 다 박살내고 싶었고,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겐 무작정 시비를 걸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밖에 표출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런 그가 목사가 되기를 꿈꾼 채 신학교에 진학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권유로 간 기도원에서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 고3 겨울방학이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신학교에 진학해 공부와 기도에만 매진했다. 꿈은 시골에서 조그만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 믿었던 연인과 목사의 배신…자살을 시도하다

    스무 살부터 7년간 연애하며, 평생의 동반자일 거라 믿었던 연인이 어느 날 자신을 떠났다. 장교로 군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듣지 못한 이별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믿고 존경했던 목사의 비리까지 접했다.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에게 버림을 받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성직자의 길로 이끈 신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았다.

    무응답은 좌절이 됐다가 분노로 바뀌었다. 분노가 복수로 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복수의 대상은 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게 신이라는 원망에 사로잡혔다. 평생 신의 뜻을 위해 살겠다는 가톨릭 사제들이 입는 로만 카라를 입고 수십 알의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렇게 영원히 잠들려고 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하루가 지나 있었다. 죽지는 않고 잠만 푹 잔 것이다.

    잠은 푹 잤지만, 분노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죽지도 못하고 의도치 않게 덤으로 얻은 인생, 이번에는 자살이 아니라 신의 말씀에 정반대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또 자신이 겪은 아픔을 여자들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몹쓸 짓이라며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저자 김성준 씨가 CBS 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장소 협조 = 홍대 인근 'You are here' 카페)

     

    ◇ 수백명의 여자를 만난 픽업 아티스트의 삶

    밤마다 술을 마셨고, 내로라하는 바람둥이와 어울리며 유흥의 길로 빠졌다. 수백 명의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삶을 살았다. 어느새 인기 픽업 아티스트가 됐고, 돈도 잘 벌었다. 1인당 수강료가 400만 원이었다. 그런 식으로 술 마시며 여자를 유혹하고, 돈을 벌면서 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후유증은 컸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았고, 대인기피증에 불면증,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또 실패했다. 또다시 자살을 선택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어요. 지금의 삶을 벗어나지 않으면 술병이든 정신병이든 걸릴 것만 같았거든요."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우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라는 광고였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새롭게 살면 새로운 삶이 찾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 막연한 환상을 품었던 호주 … 현실은 시궁창

    어학원을 통해 얻은 호주의 첫 일자리는 식당 주방에서 접시를 닦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또다시 좌절의 순간을 경험한다.

    “일한 데가 씨푸드 뷔페라 갑각류 쓰레기가 많이 나왔어요. 일일이 묶어 경운기에 싣고 냉동고에 안에다 놓으면 되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냉동고가 작동하는 ‘위잉’ 소리가 안 들리더라고요. 뭔가 불안하다 싶었는데 문을 여는 순간 바퀴벌레 천여 마리가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저와 친구에게 달려들었어요. 바퀴벌레가 크거든요. 막 날아다니고. 그것들이 얼굴과 팔에 달라붙는데...”

    충격적이었다. 막연한 환상을 갖고 온 호주.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거라 기대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온 몸에서 나는 쓰레기 냄새에, 바퀴벌레 세례까지. 앞으로도 이렇게 살다 결국 실패해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다시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좌절감에 빠졌다.

    ◇ 단 한번의 뜀이 생각을 바꿨다

    며칠간 비는 계속 내렸고, 충격의 바퀴벌레 세례 사건 이후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 숙소 앞에서 비를 피해 발코니에 앉은 새 한 마리를 봤다. 다리 하나가 없는 새였다. 그럼에도 살려고 하는 새와 자기가 대비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충만해진 감수성에 갑자기 달리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미친 듯이 4시간 정도를 달렸다. 누군가 옆에서 불러도 그냥 달렸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느낌이 살아있다는 기분을 줬다.

    이후 달리기는 그의 일상이 됐다. 틈만 나면 달렸다. 달리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됐다. 보지 못했던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고,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저자 김성준 씨가 CBS 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장소 협조 = 홍대 인근 'You are here' 카페)

     

    ◇ 자기만의 공부법, 유튜브 영어 공부법

    호주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영어를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프’라는 유기농법에 실천하는 단체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곳에서는 하루에 5~6시간 무급으로 일하는 대신 숙소와 식사를 무료로 제공해줬다. 오지라 한국인도 없어, 그곳만큼 한국어를 끊기에 좋은 곳은 없었다.

    우프에서 3개월간 지내며 혼자 영어를 공부했다. 휴대전화는 터지지 않아도 인터넷은 됐다. 컴퓨터에 앉아 무작정 ‘영어 잘하는 비법’을 검색했지만 별 도움은 안됐다. 이번에는 영어로 검색했다. ‘learn English'라고. 그렇게 일주일을 허비하다 한 영상을 만났다.

    EBS가 만든 영상이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스타들이 나와 진행자와 영어로 대화하는 방송이었다. 종일 그 인터뷰 영상만 봤다.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는 스타가 마냥 부러웠다.

    이후 다른 공부 방법은 접고, 책도 집어치우고 오로지 그 영상만 보고 들었다. 음성파일로 변환해 새벽에 일어나 2시간, 점심 먹고 2시간, 저녁 먹기 전 2시간, 자기 전 2시간. 하루 8시간을 큰 소리로 따라하면서 들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이어폰을 꼽지도 않았는데 그 영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3개월간 산속에서 영어공부를 했던 숙소. 컨테이너 박스로 돼 있다. (사진=김성준 씨 제공)

     

    ◇ 어느날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냥 따라할 뿐이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무슨 단어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말을 그냥 따라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마치 원어민처럼.

    “언어를 배우는 데에는 순서가 있어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 글쓰기나 문법부터 배우지 않잖아요. 그냥 ‘엄마’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들을뿐이죠. 10만 번 듣게 되면 뇌에 인지되고 흉내 내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 제 공부법이 그랬어요. 한 편의 영상을 만 번이 넘게 돌려본 것. 뜻은 모르지만 흉내내고, 그렇게 언어를 습득했어요.”

    그는 지금도 문법이나 쓰기는 약하다. 하지만 말하는 것 만큼은 원어민 못지 않게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자신의 방법을 알려주고 따라해 볼 것을 권유한다. 실제로 큰 도움을 얻은 수강생들이 생기고 있다.

    “최소 3개월만 꾸준히 해보세요. 되지 않을 것만 같던 언어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 호주에서 연봉 1억 신화를 이루다

    영어가 입에 붙으면서 자신감도 붙었다. 영어 다음의 목표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의 신화를 써보는 것이었다. 바로 호주에서 ‘1억 원 벌기’였다. 누군가 호주에서 1억 신화를 달성했다는 얘기에 자신도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1억 벌기 프로젝트 팀을 꾸리고, 80여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수십 차례의 도전 끝에 그는 KI라는 대기업 광산회사에 취직한다. KI 그룹의 슈퍼바이저로 업무를 총괄했다. 그때 그의 연봉이 한화로 약 9000만 원이었다. 한국에 책을 내겠다고 온 지금도 KI 그룹은 김 씨를 위한 스폰서 RSMS 영주권 비자를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그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다.

    한국에 있는 지금은 책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도 내고,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는 학생들 컨설팅을 해주고, 몇몇 사람들에게 영어 과외를 해주고 있다. 강연에 초청돼 청중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으며, ‘SEOUL GONE WILD’라는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들이 격주로 술 마시며 대화하는 모임이 있는데, 그곳의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도 전하며, 홍보이사도 맡고 있다.

    ◇ "기분 좋은 상상은 현실이 됩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30대 초반이 겪은 인생인가 싶었다. 뭐가 이렇게 다사다난한 걸까. 기사에는 쓰지 않았지만 호주 사막 횡단 중 차량 전복사고를 당한 일,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 등 더 많은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었다.

    한국 귀국 후 국회 헌정관에서 청중 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연. (사진=김성준 씨 제공)

     

    김 씨에게 연봉 1억이 아닌 정말로 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물었다.

    "사람들이 저에게 성공했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실패의 실패를 거듭한 인생이에요. 호주에서 한순간 뜀을 통해서 깨달음이 있었고, 그때부터 어떠한 상황이 와도 긍정 에너지 믿으며 포기하지 않으려 했어요. 꼭 뜀이 아니어도 긍정의 에너지를 찾는 방법은 다양해요. 중요한 건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후부터 기적같은 일들이 저를 찾아왔다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도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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