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야당의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지칭한 고영주(66)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파문에 휩싸였다. 방송문화진흥회는 MBC 대주주로서 해당 언론사 사장의 임명과 해임권을 갖고 있는 만큼 결코 가벼운 헤프닝이나 개인의 소신 정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고 이사장은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이다.
지난 2일 열린 국회 국정감사장. 그의 막말은 거침이 없었다. 문재인 대표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며 과거의 발언을 재확인하는가 하면 "친일인명사전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괴한 논리를 댔다.
그가 국가정상화추진위원장 당시 추진했던 '친북인명사전'도 논란이 됐다. 여기엔 국회 미방위 간사인 우상호 의원 등 많은 국회의원의 이름도 등재돼 있는데, 여당 소속이자 같은 검사 출신인 박민식 의원 조차 "우상호 간사가 친북용공이라면 자신이 무료 변론하겠다"며 고 이사장의 시국관을 문제삼고 있는 형국이다.
5일 열린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선 해임건의안까지 거론됐다. 물론 여야의 입장은 엇갈렸지만 부적절한 발언이란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발언은 공영방송 대주주의 이사장 자격을 의심케 할 정도로 시대착오적이다.
우선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시장경제 도입과 동구권 민주화, 소연방의 붕괴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 혹은 냉전시대의 좌우 이념대결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자 운운하는 발언은 이념의 굴레를 씌우려는 특정한 목적을 띠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1950년대 미국 공화당 의원이자 정치선동가였던 조셉 매카시가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을 연상시킨다. 매카시는 결국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지적 환경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 않는가.
고영주 이사장의 발언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48.02%의 지지를 보낸 국민들을 모독하는 발언이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유권자들은 공산주의 신봉자에게 투표한 셈이고, 여당인 새누리당은 공산주의자인 야당 대표와 정책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고 이사장은 주지하다시피 영화 '피고인'의 배경이 됐던 부림사건을 직접 수사한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33년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독서모임을 한 무고한 대학생 등 22명을 이적표현물 소지와 학습, 찬양고무죄로 엮어 구속기소한 고문조작 사건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그는 일언반구 반성을 하지 않은 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호한 문재인도 공산주의자였다는 막말을 퍼뜨렸다. 편향적인 사고와는 별개로 법조인의 상식과도 거리가 멀다.
한국 정치를 망가뜨린 주범은 뭐니뭐니해도 지역주의와 색깔론이다. 특히 색깔론의 가장 큰 폐해는 합리적인 토론과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사회를 좌우 극단의 이념대결로 몰고 간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빨갱이'로 낙인찍는 경우도 허다했다.
동영상 기록과 국정감사 발언을 종합해보면 고 이사장의 공산주의 발언은 실수라기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만큼이나 확신에 가깝다. 또 방송문화진흥회는 인사권 등을 통해 공영방송 MBC와는 특수관계에 있다.
야당은 그의 사퇴를 요구하며 법적 조치를 검토중이다. 이념편향적인 인물이 공영방송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언론의 최대 덕목인 공정성과 신뢰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거취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고 조속히 정리돼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