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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영삼 대통령, 강직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

정치 일반

    "고 김영삼 대통령, 강직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

    문민의 틀 완성한 공로 잊지말아야

    - '김영삼' 목숨 걸고 민주주의 지킨 지도자
    - 회초리 들고 '잘해라' 한 말씀 하셨어야
    - 난 '상도동계의 비주류'
    - 13대 선거, 내가 부산 출마했으면 노무현은 없었을 것
    - 1987년 대선 후보단일화 실패 아쉬워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5년 11월 23일 (월) 오후 6시 30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박찬종 변호사

     



    ◇ 정관용> 이번에는 박찬종 변호사를 전화에 모십니다. 아마도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분만큼 또 많은 애증관계가 얽힌 분도 드물 것 같습니다. 박 변호사님 나와 계시죠?

    ◆ 박찬종> 네,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오늘 조문하셨어요? 언제 하셨어요?

    ◆ 박찬종> 어제 다녀왔습니다.

    ◇ 정관용> 어제. 느낌이 어떠세요?

    ◆ 박찬종> 어제 새벽에 방송사 기자들 전화 때문에 계속 벨이 울려서 깨봤더니 어른이 돌아가셨다고 그럽디다. 지난주 수요일날 제가 김현철 교수하고 통화를 했었거든요. 일이 있어서 가끔 통화를 하는데 아버님 어떠시냐고 하니까 그만그만하시다고 그러셨는데. 너무 갑자기 그렇게 되셔서. 그래서 제가 6년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 작고하시고 6년 뒤인데. 두 분의 나이 차이만큼 그렇게 간격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어제 오전 내내 생각한 게 빈소에 가기 전에 이 두 분이 좀 건강하실 때 같은 자리에 앉아가지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화의 틀 87년 6.29선언에서 비롯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반민주적 헌법체제를 깨고 직선제로 이행된 그 정치적 자유와 과정을 확보한 이것은 절대적으로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의 목숨을 건 투쟁의 산물입니다.

    ◇ 정관용> 그렇죠.

    ◆ 박찬종> 그런데 이게 홍수철의 논밭이 자꾸 범람해서 흉작이 될 때 그 강의 둑을 아주 견고하게 쌓아서 범람을 막고 나면 그다음에 구체적으로 작물을 어떻게 재배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데 그거를 이제 우리 후계자들, 후손들. 지금 당장은 현재 정당 지도자들과 국회의원들이 할 몫인데. 지금은 말이죠. 지금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든지 또 김영삼 대통령 경구 중의 하나는 ‘피의 강을 건너 죽음의 산을 넘어 민주주의는 달성된다’ 그건 연설 때 늘 하던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지금은 닭모가지니 피의 강이니, 죽음의 산이니 그런 으시시한 과격한 용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아주 온실 속의 편안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후배들이 거기에 도취되어서 복에 겨워서 국가예산에서 일당, 이당에 퍼부어 되는 정당 보조금의 국회의원 개개인들로 후원회에 그리고 국회의원 보좌관이 나는 14대까지밖에 안 했는데 4명, 5명이었는데 지금은 12명이나 되고. 그리고 번지르르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오로지 직업으로서 국회의원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 공천 룰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한테 유리하고 불리하느냐. 친노, 비노, 친박, 비박. 친박 중에는 또 진박, 가박 또 이렇게 나누고 말이죠. 이게 무슨 꼴이냐 이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전 내내 제가 가슴이 아픈 것이 좀 건강하실 때 회초리를 들고. ‘나와 김대중 대통령은 여기까지 했고 우리에게도 과오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리가 만든 이 틀에서 더 잘해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국민들한테 호소하고 그렇게 해서 길을 열어주시고 가야지 하지 않았나, 아쉽습니다. 지금 전부 올망졸망해서 정관용 선생 말은 들을는지 모르지.

    ◇ 정관용> 아휴, 별말씀을.

    ◆ 박찬종> 이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이 상황을. 어른들이 좀 그렇게 하고 갔었더라면 이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 정관용> 말씀 들어보니까 두 분 어르신의 회초리, 진짜 그리워지네요. 이제는 그런 회초리 들 분도 없네요. 그렇죠? 그나저나 박 변호사님은 특히 YS랑 만났다 헤어졌다, 경쟁했다 손을 잡았다 여러 번이시잖아요. 맨 처음 70년대에는 처음에는 경쟁하셨죠?

    ◆ 박찬종> 여러 번 아니에요. 잘 몰라서 그러는데. 8대 선거 때는 부산 서구가 인구가 그 당시에 33만명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분구가 돼야 돼요. 그래서 분구를 전제로 하고 내가 국회의원 선거에 한번 나가보겠다 했다가 나중에 분구가 안 되니까 내가 발을 뺄 수가 없게 돼서 그 양반하고 대결한 것처럼 됐는데. 제가 그 양반을 어떻게 꺾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 정관용> 아무튼 처음에는 박 변호사님이 공화당으로 정치를 시작하셔서 그때는 경쟁하셨죠.

    ◆ 박찬종> 네.

    ◇ 정관용> 그러다가 80년에 공화당에서 제명당하시고 85년도 그때는 또 같이 하셨잖아요.

    ◆ 박찬종> 그러니까 제가 이제 공화당으로 낙선하고 나서 1년 반만에 유신이 선포되더라고요. 그래서 갈등이 많았죠. 혼자 뛰어져 나오려고 하니까 겁도 나고. 그러다가 그 시대가 10.26으로 끝나고 제가 국회의원 두 번 하면서 공약이 공화당이 야당 해야 할 날이 오면 나는 야당 한다는 게 공약이었어요. 두 번째로는 국회의원 배지 안 달겠다는 것이 공약이었고. 내가 5선 국회의원 하는 동안 한 번도 배지 안 달았어요. 내가 농담으로 그럽니다. 보도사진에 내가 배지 달고 있는 걸 갖고 오면 내가 100만원씩 주겠다고. 단 일이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같은 선거구에 김종필 총재께서 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안에 자기는 반대했다고 그러는데 그게 표결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냥 백두진 의장이 방망이 쳐버렸는데. 저는 그 당시 신라호텔 이른바 대책회의의 법사위원이니까 참석해서 공화당 중진들하고 요건이 안 된 다고 얘기를 해서 이게 10.26이 안 났으면 저도 굉장히 당할 뻔 했다고. 저도 확실히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 정관용> 그리고 80년도에도 어차피 민주 쪽에 편을 서셔서 85년 신한민주당 때부터 함께 하셨죠?

    ◆ 박찬종> 이런 과정을 김영삼 대통령께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민주당 만들고 할 때 저를 부르고 해서 사인하라고 그래서 두말 안 하고 사인했고. 민주당 만드는 비사가 오늘 시간이 짧아서 길게 얘기를 못 드리겠는데. 전직 의원이 많이 사인을 해야 국민들이 보기에도, 언론이 완전히 통제돼서 민주당이 생기는지도 모를 때입니다. 그러나 외신에 보도될 때 전직 의원이 가령 수십 명이다 하면 훨씬 보기 좋은데 모두 사인을 안 해요. 위험하니까. 달랑 16명 했어요. 김영삼, 김대중, 김상현 쭉 이래가지고. 거기에 제가 굉장히 열심히 해서 제가 4명의 사인을 받아냈다고. 그래서 아마 하나씩 받아올 때마다 김 전 대통령이 좋아서 날 껴안고 그랬다고. 그래서 신한민주당 함께 만들고 인권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11일 선거 때 인권위원장 그대로 유지됐는데 전두환 정권이 저에게 보복을 했죠. 그게 고대 앞 시위사건입니다. 12대 국회 열린 직후에. 그래서 정기국회도 거의 두 달을 열지 않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제가 조순형 의원하고 저하고 기소가 됐죠.

    ◇ 정관용> 그게 벌써 30년 전 일이고. 그러다 87년 양 김 단일화를 위해서는 직접 삭발도 하시고 그랬는데 결국 성사가 안 됐고 그렇죠?

    ◆ 박찬종> 네. 그거는 어찌됐는가 하면 두 양반이 약속을 했거든. 우리는 민주화가 될 때까지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하나가 될 것이다. 그 13명이 정풍 운동을 해서 단일화 촉구했는데 말 안 들으니까. 그래서 끝까지 원대 복귀를 안 한 게 박찬종, 조순형, 장기욱, 이철이야. 나머지는 이쪽, 저쪽으로 김대중 당이 생기니까 김대중 당으로, 그다음에 김영삼 당은 김영삼 이렇게 가 버렸는데. 저는 끝까지 남다 보니까 이제 13대 선거가 왔는데. 아니, 김 총재가 저를 불러서 지나간 일이니까 너는 부산 선거구에 나가라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 정관용> 88년에.{RELNEWS:right}

    ◆ 박찬종> 네, 그렇죠. 총재님 보십시오. 제가 삭발해서 머리가 이런데 이 꼴로 해서 어떻게 나갑니까? 그래서 끝내 거기 안 나가고 서울 서초구에서 무소속으로 심판을 받았는데. 제가 부산을 떠났기 때문에 제 원 선거구가 소선거구제로 세 곳으로 분할되면서 김 대통령께서 그 적임자를 찾는데 애를 먹었어요. 그때마다 내 생각을 하고 원망을 굉장히 했을 것 같아요. 노무현 변호사가 제 선거구 하나에 마지막에 그게 스카웃됐는데. 이게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제가 김 대통령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산에 나갔다 그러면, 노무현 대통령 시대는 없었을 거예요.

    ◇ 정관용> 그럴 수도 있죠.

    ◆ 박찬종> 이게 참 역사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갈림길인데.

    ◇ 정관용> 그런 의미로 보면 박 변호사님은 양 김과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내신 분이지만 동시에 양 김의 어느 계보의 그 문하생이 아니라 양 김 정치에 또 맞서서 투쟁도 하셨던 분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 박찬종> 그렇죠. 그런데 상도동계 비주류지. (웃음)

    ◇ 정관용> 그래도 어쨌든 92년 대선 때는 직접 대선에 출마하셔서.

    ◆ 박찬종> 아, 그건 해명을 좀 해야겠는데. 그건 제가 삭발해서 후보 단일화 세력이 형성됐어요. 1987년 때는 백기완 선생이 출마하셨잖아요. 제가 삭발하는 것을 보고 11월 6일 날이었는데 그 이튿날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이 150명도 삭발을 했어요. 그리고 단일화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조정을 위해서 노력을 하셨는데 그 두 양반을 불렀는데 안 나타난 거예요.

    ◇ 정관용> 아이고, 박 변호사님 지금 이렇게 나가면 시간 내에 못 끝냅니다. 그래서 지금 한 2분밖에 안 남아서. 제가 그냥 쭉 우여곡절 많은 스토리를 쭉 정리해 드렸고, 누구보다 또 함께했다, 또 경쟁했다. 그런 역사를 가지신 박 변호사님이 김영삼 전 대통령 인간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실래요?

    ◆ 박찬종> 아, 김영삼 대통령은 어떤 주역을 전공한 운세학 학자가 말씀하시기를 성격이 굉장히 강하다, 이거야. 제가 어제 빈소에 가서 쓴 글이 ‘직정경행 신념의 지도자’라고 썼는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양보를 안 합니다. 절대로 양보를 안 해요. 이런 데 있어서 타협을 안 해요. 삼당 합당한, 자기가 다른 생각으로 모든 걸 무릅쓰고 돌파를 해서 거기 가서 대통령이 돼서 문민 틀을 강화했거든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도전하거나 김영삼 대통령하고 대결했던 사람들은 전부 꺾어져 버렸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그 경우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그렇고. 좀 안됐지만 이회창 선배도 그런 경우예요. 김영삼 대통령이 덤벼들었거든. 그렇게 해서 굉장히 강한 양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 문민 틀을 만드는 데 그렇고. 정책적 실패는 많이 있죠. 있지만 그 실패가 IMF 위기라든지 측근비리라든지 있다 하더라도 그이가 만든 문민 틀, 김대중 대통령과 공동으로 만든 이 틀의 공로를 크게 깎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후배들 입장에서는. 다만 후보 단일화는 안 한 거는 그건 굉장히 아쉬워요.

    ◇ 정관용> 그건 책임져야죠, 사실.

    ◆ 박찬종> 그건 책임져야죠, 사실. 두 분이 회고록을 썼는데. 거기에서 별로 심각하게 언급이 없고 저는 그때 혹시나 하고 그 회고록을 봤는데. ‘박찬종 이 녀석에게 나는 미안하다’ 이런 구절이 한 줄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고. (웃음)

    ◇ 정관용> 그래요. 아까 처음에 말씀하셨던 오늘날 정치인들 이 두 분한테 회초리 좀 맞아야 된다는 말씀, 그 말씀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 박찬종> 그것만은 두 분이 하고 가셨어야 했는데.

    ◇ 정관용> 아쉽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 박찬종> 네, 감사합니다.

    ◇ 정관용> 박찬종 변호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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