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배우 그리고 제작사 및 투자·배급사. 한 편의 영화를 대표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영화 한 편이 나오기까지 거치는 손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일을 다하는 숨은 영화인들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영화 스토리보드 작가가 되고 싶어요. 뭘 해야 하나요?"
아마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해줄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토리보드 작가, 그 중에서도 영화 스토리보드 작가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이 별다르게 없기 때문이다.
임선애 작가는 바로 이 질문에 답해 온 경력 14년 차의 스토리보드 작가다. 그 시간 동안 '왕의 남자', '도가니', '화차', '수상한 그녀', '해무' 등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은 영화들이 임 작가의 손 끝을 거쳐 세상에 태어났다.
임선애 작가가 스토리보드 작업을 맡았던 영화 '해무'와 '수상한 그녀'의 포스터.
◇ 스토리보드 작가가 하는 일이 뭐예요?낯설고도 생소한 그 이름 스토리보드 작가. 그러나 이들은 영화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글'로 쓰인 시나리오가 하나의 완벽한 영상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스토리보드'가 필수적이다. 임 작가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만 해도, 스토리보드의 세계는 '미개척지'와 다름없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게 2000년이었을 거예요. 그 때만 해도 광고 쪽은 스토리보드 작업이 많았고, 자리가 잡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영화는 콘티부에서 스토리보드를 항상 제작하는 건 아니었죠. 영화 자체가 몇십 억 원 되는 작업이니까 투자사나 감독들이 스토리보드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어요. 투자사 입장에서는 먼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싶고, 감독도 전체 콘티를 짜보면 앞으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도 당시에는 이런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스토리보드 작업은 스토리보드 작가를 중심으로 감독, 촬영감독, 스크립터 등이 모여 아이디어를 짜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감독이 구상해 온 신(Scene)을 이야기하거나, 줄콘티(글로 풀어 쓴 콘티)를 모니터에 띄우면 이를 연상해 빠르게 스케치한다. 촬영 감독도 마찬가지로 촬영 방법과 구도 등에 대한 의견을 낸다. 하루에 대여섯 신 정도가 나오면 많이 구성한 편인데, 작업실로 돌아가 세부적인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회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보통 두세 달가량이 걸린다.
"영화에서 편집되지 않고 제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보람차죠. 조금 아이러니한 문제도 있어요. 사실 스토리작업을 시작할 때 모든 상황들이 준비돼서 시작하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떤 영화팀은 스토리보드를 형식적으로 짜기도 해요. 어차피 바뀔 건데 제작사나 투자사가 원하니까 하는 심리? 그러면 제 입장에서는 능률도 안 오르고 소모적인 느낌이 들어요. 스토리보드가 촬영 전까지는 그림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거든요. 이 중요성을 알고 있는 감독님들과 만나는 것이 좋아요. 감독님들이 다른 외부 스케줄 잡지 않고, 꼼꼼히 구상해서 설계도를 만들면 능률도 오르고 작업도 빨리 끝나요."
"홍상수 감독님 같은 스타일 아니고서야 대부분 스토리보드를 원한다"는 임 작가의 말처럼 스토리보드는 촬영 현장에서 핵심적인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다. 거대한 공동 작업인 영화 특성 상, 많은 수들의 스태프들이 움직이는데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앞으로의 작업을 예상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태프들이 스토리보드를 더욱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되고자 하는 이들도 많다. 임 작가가 인터넷 상에서 운영하고 있는 '영화 스토리보드의 모든 것' 카페는 회원수가 1600여 명에 달한다. 스토리보드 작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카페에 모여들었고, 임 작가는 이곳에서 자신이 축적해 온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아 모든 정보를 집약해 '한국 영화 스토리보드'라는 책도 출간했다.
"스토리보드 작가를 꿈꾸는 분들 중에서 애니메이션 전공이나 만화 전공한 분들이 꽤 있어요. 그림은 정말 잘 그리는데 영화 메커니즘을 잘 모르다 보니 프레임 안에서 그림을 그려야 되는 화면비에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영화도 잘 모르는데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려면 어떤 연습이 필요한지 공부를 했어요. 그게 쌓이고 쌓여서 저만의 노하우가 됐고, 카페를 통해 공개했죠. 후배들에게 그게 많이 도움이 됐나 봐요."
작가들마다 작업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1인 프리랜서 작업을 하는 이들도 있고, 임 작가처럼 작업을 시작하면 어시스턴트와 함께 하는 이들도 있다. 아예 회사 시스템을 갖춰서, 문하생 개념처럼 보조 작가를 두는 메인 작가들도 존재한다. 임 작가는 스토리보드 작가를 '선택받는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의뢰 받기를 기다리고 선택받는 직업이죠. 영화 스태프 대부분이 그래요.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생계가 힘들어질 때가 있어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도 중간 중간 광고 스토리보드 작업을 했었어요. 학생들 단편영화나 졸업영화에 참여해 인연을 맺는 것도 좋죠. 그 친구들이 결국 상업 영화로 진출하는 감독들이니까요. 요즘에는 사전제작 식으로 진행되는 드라마, 특히 액션 장면이 필요한 드라마는 CG 분량 때문에 스토리보드를 많이 필요로 하더라고요. 예전보다 수요가 많아진 건 사실이에요."
임선애 스토리보드 작가.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 열정만 있으면 하는 일? '열정 페이' 만연한 현실"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얼핏 듣기 좋은 이 말은 때때로 '열정 페이'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제 막 영화 시장에 진입한 스토리보드 작가들은 제대로 된 기준 없는 저임금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일쑤다.
"경력이 많고 흥행한 영화를 많이 하면 그 해에 작업을 많이 하거나 몸값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지금 막 데뷔하려는 친구들은 이력을 채우기 위해 적은 금액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것이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제살 깎아먹기죠. 그 단가에 인건비가 맞춰지는 거니까요. 너 아니어도 그 가격에 할 작가들 많다.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죠. 결과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경력을 쌓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업계에서 부르는 것이 값이기에 경력 있는 작가들은 독립영화를 했다가 단가를 싸게 맞춰 달라는 요구도 받는단다. 사실 독립영화라고 다를 것은 없다. 상업영화와 똑같이 장편인 경우에는 작업의 강도가 똑같기 때문. 예산이 적으면 적을수록 내부 인건비가 깎일 수밖에 없고, 이런 사정을 알기에 스스로 단가를 낮춰 참여할 뿐이다. 배우부터 영화 스태프들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영화 예산과 작가 경력 대비 단가가 책정됩니다. 업계에서 작가 단가가 얼마인지 이야기가 다 돌아요. 예를 들어 상업영화를 하고 독립영화를 한 다음 바로 상업영화 작업 제안이 들어왔는데 전작인 독립영화 수준에 단가를 맞추려고 하는 일도 있어요."
추가 작업에 대해서는 대개 '무료 봉사' 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임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업계 인식을 지적했다.
"스토리보드 작업 자체의 종료 시점이 분명치 않아요. 나중에 촬영하는 와중에 작가를 부르는 감독님도 있는데 사실 룰에 안 맞거든요. 저희는 일반적으로 프리 프로덕션에서 끝나는 거니까요. '한 번 와달라'고 하면 가서 콘티를 수정하는데, 사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게 타고난 재능은 아니거든요. 재능 기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작가들도 돈 들여서 학원 다니고 열심히 그림 배우는 사람들인데. 저도 처음에는 정말 못 그려서 연습 많이 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노동력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문화 예술계 직군에서 볼 수 있는 협회나 조합 등도 꾸리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전부터 스토리보드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해 온 광고계에는 광고 스토리보드 작가 협회가 있는데 영화는 좀처럼 기회가 없어 공통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작가들끼리 서로 얼굴은 본 적이 있는데 작업 방식이 다 달라서 함께 모여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일단 제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에서는 보수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고 대답해주는 편이에요. 돈을 주는 사람이 기준을 만들어 버리니까 저희는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긴 하죠. 이 정도 작업 양이면 얼마를 받아야 한다는 기준 자체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광고는 컬러와 흑백을 나눠서 한 컷당 그 금액이 정해져 있습니다."
기준이 정해지지 못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광고의 스토리보드 작업과는 그 성향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단가가 낮아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외 발표용이 아니라, 저희끼리 보고 소모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림 각각의 질이 높을 필요는 없어요. 색을 입히는 것도 필요가 없고요. 버리기도 하고, 수정도 많이 되고 그래서 컷당 금액을 매기기도 애매해요. 아마 우리 작가들에게 100컷 정도 나오는데 얼마나 받느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계산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당황할 것 같아요. 경력 10년 넘은 작가들이 받는 평균은 분명히 있겠죠. 그건 막 시작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밑으로 내려가면 안 돼요."
임선애 스토리보드 작가.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 '표준계약서'가 보여준 희망, 그리고…
임 작가는 올해 한국감독조합이 발표한 표준계약서에서 희망을 봤다. 영화계에서도 서서히 공정한 계약과 정당한 보수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아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업 환경이 변화하고 있고, 스토리보드 작가들에게도 그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래도 차츰 좋아지고 있어요. 최근에는 월급제를 하는 회사도 늘고 있더라고요. 자기 보수를 월급으로 나눠서 받는 거죠. 예전에는 보수가 500만 원이라고 하면 그 돈을 계속 밀리다가 추석에 떡 값이나 하라고 100만 원 주고 끝나는 경우도 허다했어요. 아직 구분 짓기가 애매한 스태프들에 대해 더 전문화되고 세분화될 필요가 있기는 한 것 같아요."
육아 때문에 잠시 스토리보드 작가 일을 접은 그는 쉬는 동안 웹툰을 연재했다. 파스타 가게가 주 무대인 '로마면옥'이라는 이 웹툰으로 웹툰 회사로부터 드라마화 제안을 받아 대본 작업 중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없지만 임 작가는 창작 작업에도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남편이 요리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우리 이도 저도 안되면 파스타 가게나 차려볼까.' '그러면 간판은 무엇으로 할까.' 이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어요. 파스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수도가 '로마'니까 '로마면옥'으로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가게를 차릴 돈은 없으니까 그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던 미대생이 스토리보드 작가를 거쳐 이번에는 웹툰 작가와 드라마 작가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오랜 꿈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임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상원 전문사 극영화시나리오를 전공하기도 했으니. 그는 과거 몇 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와 각색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연히 자신의 졸업 영화를 연출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