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졸> 앞에 선 질 바비에.
미술작가 질 바비에는 현실을 비현실적 상상력에 의해 자기 세계로 만들어간다. 그 비현실적 상상력은 세상의 대상들과 관계맺기를 가능하게 한다.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분리되어 있던 사물들은 작가의 상상의 촉수가 가닿는 순간부터 작가와 관계맺기를 하며 작가의 세계로 들어온다. 비현실적 상상력은 현실과 거리를 두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대립이 해소된 현실은 더 이상 인식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정체성과 함께 소통하는 주체적인 관계로 변화한다. 이때 비로소 비현실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정체성은 대상들과 만나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현실은 무한히 확장되고 변주된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 질 바비에의 전시 제목은 <에코시스템>이다. '에코시스템'은 '생태계'로 번역된다.철학자 박이문의 정의에 따르면, 환경이 인간 중심적 개념인 데 반해, 생태계는 생물 중심적 개념이다. 생태계는 인간을 특별한 위치에 놓지 않고 수많은 생물종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다. 환경이 특정한 생명체, 특히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강조하는 데 반해, 생태계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환경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형이상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생태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불가분의 의존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생태계'의 원리를 바탕으로 그 비현실적 상상력을 미술작품을 통해 무한히 확장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992년 작품 <그림에 거주하기(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창가에 놓인 꽃병,1618)>
작가는 사물, 인체, 언어가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 중 '그림에 거주하기'연작과 '고기에 거주하기'는 작가의 이런 생각을 쉽게 표현한다. '그림에 거주하기' 연작은 복제된 고정 정물화 속에 그림의 주제와 무관한 아주 작은 건축물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질 바비에에게 이 작업은 "사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 내부로부터 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작가와 소통을 하는 상호 주체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예술 세계에서 '장악'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사전>
이 '장악'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그의 전시작 '사전' 연작이 떠오른다. 두꺼운 사전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대형 화폭에 필사한 것인데, 작가 초기시절부터 일요일마다 진행하며 식사 후 디저트처럼 아껴가며 그 작업의 맛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질 바비에는 사전 필사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포기하는 것, 내려놓은 것'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작품 '사전'이 '장악'이라는 표현과 겹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사전'연작에서 이미지의 뛰어난 모사에 있다. 그는 에케 호모의 '보라 이 사람이로다(예수 초상)',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조르주 브라크의 '바이올린과 주전자' 등 대가들의 작품들을 솜씨 좋게 모사했다. '그림에 거주하기' 연작에서도 빌럼 헤다의 '바니타스' 등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대가들의 작품을 뛰어나게 모사했다. 이들 두 연작의 제작시기를 보면 '사전' 연작은 1992년부터 시작했고, '그림에 거주하기' 역시 1992년 작품들이다. 그렇다며 질 바비에의 이 두 연작 제작 의도는 신출내기 화가로서 미술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즉 과거 미술 대가들의 작품들을 솜씨좋게 모사해냄으로써, 자신도 과거 형식의 표현은 자유자재로 해낼 수 있음을. 미술 대가들의 세계 안에 들어가 그 안에서 자신의 위상을 가늠해 본 것이고, 과거 대가들의 미술세계를 자신의 인식 안에서 장악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세계의 방향은 과거 대가들의 세계를 넘어선 새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메세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버블 이미지> (2003)
그의 작품 중 '버블 이미지'(2003)는 소비사회를 포르노그래피에 빗대 풍자하고 있다. 검은 바탕에 버블을 상징하는 크고 작은 원 안에 30개 가까운 이미지들이 담겨 있다. 잡지에서 따온 것인데 성적 이미지들이 많다. '버블'은 일회적이고, 곧바로 사라지는 특성을 상징한다. 작가는 "커플, 결혼은 마케팅에서 상품 이미지와 같다. 즉 똑같이 코드화하는 것이다. 포르노- 성관계- 코드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기쁨, 죽음 등 인간의 감정도 코드화한다. 우리는 포르노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감춤, 거리가 없이 모든 것이 노출되고, 교환가치로서만 분류되는 사회. 가치가 아니라 가격으로 평가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체스 졸'연작은 작가 본인의 얼굴 형상에 다양한 의상과 표정을 담은 조형물들이다. 이 졸들은 체커게임에서 말로 사용된다. 이번 전시에는 교황, 슈퍼맨, 광대, 턱시도 차림의 신사, 그리고 발기된 성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인간주사위 형상 등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 체스 졸 형상들은 저의 축소판이다. 다양한 몸을 빌어 거주하고 싶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따라 종교, 과학, 성의 세계에서 최고 자리까지 누려보게 된다. 이런 호사가 전부일까? 아니다. 반전이 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여왕'이 된 첫 번째 졸이 교황이었습니다. 라틴 문화에서 교황은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교황 졸이 게임 판 위에서 '여왕'이 된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더군다나 여성이 되면서 교황은 은 더 큰 권력을 갖게 되었죠"라고 밝혔다. '체스 졸'의 묘미는 우연성과 반전에 있다. 여성이 교황이 된다는 상상은 여성 목회자, 여성 사제의 인정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던진다. 또한 모든 분야가 가부장문화에서 남녀평등의 문화로 바뀌어야함을 일깨운다. 생태계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흙수저, 금수저 경계를 무너뜨리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새로 짜야 한다.
<인간 주사위의 추락(나골)>
작품 '인간주사위의 추락(나골)'은 성인의식 나골과 인간주사위 말을 결합한 것이다. 나골은 작가의 고향인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의 성인의식을 일컫는 말로, 청년들은 20미터 높이의 탑 위에서 몸을 던진다. 작가는 이 작품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주사위는 낙하하는 동안 땅에 구르지도 않고 하나의 숫자를 가르키지도 않습니다. 인간주사위의 낙하는 영원히 결정을 보류하게 만드는 시간을 뿐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우연적 원리를 따르는 게임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이 신비는 주사위가 손을 떠난 순간과 하나의 숫자를 가리키게 되는 순간 사이에 있습니다. 주사위가 6,4 혹은 1을 가리키는 것처럼. 짧은 순간 동안 우연은 작동되지만 아직 최종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필자는 이 작품의 의미를 넓혀보고자 하다.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은 한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고, 주사위 숫자가 결정된 순간은 그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 인간의 일생을 주사위가 한 번 던져진 시간이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시간 동안에 우연성을 통과하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인간이 아닐까.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세포 자동자 원리에 영감을 받은 작품 '생명 게임'을 접할 수 있다. 세포 자동자는 특정 표본 세포의 증식과 정체, 그리고 죽음을 체계화할 수 있는 기계이다. 작가는 "저에게 있어서 세포 자동자는 예술, 자유, 인과관계의 논리 등에 대한 저의 직관적인 사유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 계기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질 바비에의 작품 세계는 생성, 소멸, 변화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증식되는 세포 분열과도 같다.
큐레이터 가엘 샤보는 "이 작품들은 작가가 말했듯이 끊임없이 "모든 것을 하고, 모든 것을 시도하라"는 강요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강요에도 굴하지 않는 창작의 자유를 보여 줄 것이다"고 했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