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타계한 작가 움베르트 에코(1932~2016.2).
- 이 작가에 '내 인생의 책'은 무엇이었을까?
"내 나이 스물넷에 보르헤스를 처음 읽었어요. '픽션들'은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단 500부만 찍었지. 그 출판사의 대표를 알고 지냈었는데, 내게 단 한 권을 주더라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지. 이후 언제나 내 사랑은 보르헤스였어요."
-그렇게까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내 철학의 관심, 내 궁극적 질문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오. 나는 위조와 날조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철학자고, 철학자는 당연히 진실에 관심이 있는 법이지. '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나 위조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뭐가 진실인지를 알고 시작해야 해. 반쪽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둘은 연결되어 있지.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
─ '탐독', 움베르트 에코, 90~91쪽
책 애호가이자 수집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장서량은 5만 권이었다고 한다.
그 5만 권을 진짜 다 읽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보통 뭐라고 대답하나요?
"정말 다 읽었느냐고 무례하게 묻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다니, 질문이 철학적이군.(웃음) 상대방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준비해 둔 다섯 개의 대답이 있소. 1번은 '그보다 더 많이 읽었소!' 2번은 '읽었으면 이 책들이 왜 여기 있겠어.' 3번은 '읽은 책들은 다 치웠소. 다음주에 읽을 것들만 여기 있지.' 그러고보니, 4번과 5번은 생각이 안 나는군. 어리석은 질문이 많이 있었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혹은 읽어도 몇 권만 겨우 읽은 사람들은 왜 나 같은 사람들이 서재를 가지고 책을 보관하는지를 모를 거요. 언젠가는 꼭 알고 싶고, 참고하며 필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안 읽은 책을 갖고 있는 이유겠군요.
"이런 일이 있어요. 30년 전에 산 책이고 나는 한 번도 읽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그 책을 완벽히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일인데, 첫 번째는 내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이 책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요. 두 번째는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읽다 보니 다 알게 되는 경우지.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에 관해 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읽은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요. ─ 움베르트 에코, 105~106쪽
"당신을 바꾼 단 한 권의 책은 무엇입니까?"
신간 '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김영하, 조너선 프랜즌, 정유정, 김중혁, 움베르토 에코, 김대우, 은희경, 송호근, 안은미, 문성희. 이들은 소설가, 철학자, 영화감독, 사회학자, 무용가, 요리 연구가 등으로 직업은 다르지만,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우리 시대의 대표 예술가와 학자 들이다.
책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지만, 그들의 삶과 그들 각자가 읽어 온 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달과 6펜스'에 담긴 탈주의 서사는 ROTC 장교의 길을 포기했던, 교수직을 그만두었던 김영하 자신의 인생과 겹쳐지면서 "무엇이 한 인간을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정유정이 글을 쓰는 이유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추장 브롬든이 맥머피를 구원한 그 순간처럼 사건과 의미가 함께 오는 순간을 만들고자 함에 있다.
요리 연구가 문성희는 아예 현실에서 '월든'의 삶을 실천했다.
책 속으로 “나는 굉장히 헌신적이고 경쟁심도 강한 사람입니다. 나는 소설가의 팀에서 뜁니다. 우리 팀이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설이 이기기를 원한다는 거죠. 현 상황에서 이긴다는 것은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항상 제 야심의 첫 번째였습니다. 소설이 살아 있는 예술의 형태임을 입증하는 것!” ─ 조너선 프랜즌, 46쪽
“책상 앞에 앉으면 허허벌판. 글 쓰는 요령은 전혀 늘지 않아요. 무명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더듬더듬. 지난번에는 소설 쓰는 천명관 선배와 통화하다가 진도가 안 나간다고 투덜거렸더니, ‘그래도 무조건 계속 써라.’라고 충고하더라고요. 뭐야, (웃으며) 자기 천재라고 자랑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쓴다는 게 용납이 안 돼요. 내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 머릿속에는 없겠어?” ─ 정유정, 64~65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아홉 번 읽었을 때, 책은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연애소설, 두 번째 읽으니까 철학소설. 세 번째 볼 때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말하자면 소설 작법에 대한 소설. 크게 세 가지 창이었는데, 또 한 번 읽으니까 다시 연애소설로 읽혔다고 한다. 어쩌면 연애소설이라는 창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함께 들어 있는지도. ─ 김중혁, 77쪽
“나는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져요. 완성의 기쁨이 아니라,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게 더 즐겁습니다. 내 소설의 서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쪽이라기보다,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편이죠.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어요. 갈릴레오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세 번째 소설인) 『전날의 섬』의 모티브를 찾았던 건데, 이런 조사와 공부가 좋아. 그런데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 더는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되잖소.” ─ 움베르토 에코, 103쪽
『로빈슨 크루소』를 건조하게 요약하면 사적인 여행기다. 배가 난파되고 그 안의 사물 역시 난파한다. 주인을 상실한 것. 생존자는 오직 로빈슨 크루소 한 명. 그는 이제 이 흥미로운 물건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내고 주인이 된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원래 내 것은 아니었던 사물과 물품들. 김대우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는 그 지점에 있다. 남에게 보여 주기는 창피하지만, 나 홀로 탐닉하는 즐거움. ─ 김대우, 113쪽
유길준은 그 두 세계를 접합해 하나로 녹여 내려 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 감히 성리학의 울타리를 넘어 미지의 근대 세계에 한 발자국 들여놓은 것이다. 서툴기는 했어도, 두 세계의 접목을 향한 과감한 시도가 바로 『서유견문』의 정수이자 혼이었다. 송호근은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과거에는 새것을 들여와 옛것을 해석했다면, 이젠 그걸 뒤집어야 할 판이었다. 옛것을 불러다 새것을 해석해야 했다. ─ 송호근, 156~157쪽
지금은 다시 전국을 돌며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춤을 채록한다. 보통은 국도를 타고 돌아다니다 시골 동네에 붙은 플래카드에서 ‘사냥감’을 발견한다. ○○초등학교 37회 체육대회, ○○고등학교 총동창회 같은 플래카드들이다. 때로는 산악회 점심 자리를 우연히 만나 무조건 들이대기도 하고,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아저씨들에게 무작정 졸라 대기도 한다. 쑥스럽고 민망해 사양하는 아저씨도 많지만, 읍소 끝에 보여 주는 그들의 몸짓에는 절묘한 긴장과 묘한 힘이 있다. ─ 안은미, 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