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녀의 기도'에서 묘사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에서 시작하는지를 10년 후의 일상을 통해 고민케 한다. 모든 집 옥상에 드론 착륙장이 설치된 시대, 이웃집 소년을 짝사랑하던 한 소녀가 선물과 고백 편지를 실은 드론을 소년의 집 옥상으로 보낸다. 하지만 드론은 매번 착륙을 거부당한다. 허가받지 않은 드론으로 인한 피해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드론 착륙장 해킹? 혹은 메신저를 통한 고백? 아니면 옛 이야기처럼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는 용기를 내야 할까?
소설집 '10년 후의 일상'에 수록된 33편의 짧은 소설은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발전한 10년 뒤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을 담고 있다.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이 더해져 놀랍도록 발전한 의료기술 시대이지만 누군가는 콧물 감기약이 없어 이미 상해 버린 약을 세척해 먹어야 한다. 자율주행자동차로 여행을 떠난 가족은 창가에 해변도로를 매달아 놓고 각자의 가상현실에 빠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때론 가상현실 속에 완전히 거주하며 정부가 제공하는 음식 쿠폰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
단편 '0.03%'에서 세 명의 직장인은 부드러운 곡선의 해변가의 바에서 피자와 맥주를 마시며 업무 회의를 한다. 사무실과 오피스 근무는 효율성 때문에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회의를 하던 세 명의 회사원들의 스마트폰에 '0.03%'란 숫자가 뜬다. 이전에 업무를 돕던 오피스 프로그램처럼 이 프로그램 역시 업무용 프로그램이다. 다만, 직장인들의 회사 기여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피드백해 준다는 기능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미래 업무 환경은 이렇게 음울하기만 할까?
단편 '점심시간'에서는 어릴 적부터 프로그래밍 교육을 받는 덕분에 누구나 간단한 앱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세상의 회사 풍경을 보여 준다. 작품 속 직장인들은 점심 메뉴를 고를 때, 공평성을 기하기 위해 만든 '점심 메뉴 결정 앱'을 사용한다. 스마트폰 화면에 근처 식당의 메뉴들이 흘러가는 동안, 사람들의 표정과 호흡, 눈동자의 움직임 등을 스마트폰이 수집하여 수치화해 현재 가장 원하는 메뉴를 알아서 찾아내 주는 앱이다. 그리고 이 결과를 다수결에 따라 정리하여 점심 메뉴를 정한다. 이 앱을 활용해 신입사원 민서는 짝사랑하는 선배인 성민이 좋아하는 음식이 항상 점심 메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고 그래서, 가끔 나름의 수를 써 썸을 유도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인공지능은 우리 삶의 밑바닥을 흔들어 놓는다. 단편 '세 번째 눈'에 등장하는 줄리아는 연인 간에 사용하는 SNS서비스가 해킹당했을 때 유출된 데이터를 갖고 있다. 결혼을 간절히 바라는 그녀는 소개팅에 나가 이 데이터를 활용하기로 한다. 소개 남성을 앞에 두고 그가 무얼 좋아하는지, 이전 연애와 현재 주변의 여자는 어떤지 검색하며 실제 그가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진심과 다른지를 깨닫는다. 누군가의 진심이 몇 번의 검색만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 특이한 소설집에는 신기한 동시에 평범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트렌드를 좇는 사람들은 결국 늘 쫓기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본질을 좇는 사람들 뒤에는 늘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 소설집에서 힘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은 오직 하나뿐이다. 작가가 본질을 좇기 위해 '잘못 뚫은 구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색창연한 유물을 발견할 수 있다. 짧은 소설들이 모인 이 IT소설집은 마치 인간지능의 늪에 갇힌 인류의 일상을 클로즈업하여 가끔은 코믹하게, 가끔은 씁쓸하게, 또 가끔은 엽기적이면서도 발칙한 일상을 펼쳐 보인다.
편석준 지음/레드우드/224쪽/12,500원
'막시밀리앙 헬러'는 프랑스 작가 앙리 코뱅(1847~1899)이 24세의 나이에 처음 발표한 장편 추리소설이다.
'막시밀리앙 헬러'는 추리문학사상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과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 사이에 맥을 잇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문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제작'이라는 꼬리표는 감히 말해 '셜록 홈스 표절 논란'과 연관되어 있다. 누군가가 셜록 홈스를 표절한 것이 아니라 셜록 홈스가 누군가의 표절일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미셸 르브룅이 1970년대에 들어와 최초로 그런 개연성을 거론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논란의 불씨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미셸 르브룅은 '추리소설의 연금술사들'(1974) 등에서 줄기차게 그 가능성을 언급했다. 요컨대 16년의 시차를 두고 파리와 런던에서 제각기 등장한 두 명의 아마추어 탐정이 시공을 초월하는 닮은꼴을 보인다는 점인데, 우연한 영감의 일치로 보기에는 그 닮은 점들이 너무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차원이라는 게 논란의 골자다.
당대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이자 작가 지망생이던 앙리 코뱅의 처녀작 '막시밀리앙 헬러'가 발표된 해는 1871년, 의사이자 작가였던 코난 도일이 셜록 홈스의 첫 작품 '주홍색 연구'를 발표한 해는 그보다 16년이 더 지난 1887년인 것이다. 단순한 시차 문제를 넘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코난 도일이 에밀 가보리오를 탐독하고 작품 속에서도 경의를 표할 만큼 프랑스 문학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때 파리에 머물러 살기도 한 코난 도일은 '막시밀리앙 헬러'가 발표된 1871년 열두 살이었기에, 당시 큰 각광을 받던 문제의 작품을 직접 읽었을 개연성이 높다. 실제로 이러한 논의는 주로 프랑스 쪽 추리소설 연구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화제성을 제쳐두고도, '막시밀리앙 헬러'는 당시 프랑스 대중소설로는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빠른 전개와 군더더기 없이 치밀한 구조로 작품 자체의 현대적 독창성이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받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