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언젠가 서서먹는 갈비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왜 굳이 서서 먹나?' 의아했다. 나는 앉아서 편하게 먹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굳이 서서 먹어도 좋은 식당이 있으니 바로 '연남 서식당'이다.
60년 전통의 원조집인데다 관광객들이 줄서는 집이라고 해서 섭외가 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방송 출연 섭외를 하다보면 사장하고 통화도 못해보고 거절당하기 일쑤니까. 그런데 가게 직원이 의외로 사장 직통 번호를 순순히 알려줬고 사장과의 통화도 단번에 이뤄졌다.
일흔을 넘긴 이대현 사장은 좀 망설이는 듯 했으나 일단 허락을 한 후에는 나의 끈질긴 인터뷰에도 짜증내는 일 없이 심지어 일목요연하게 잘 응대해줬다. 사실 일흔 넘은 어르신들과 인터뷰하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전화 인터뷰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질문에 딴 소리를 하거나 질문과는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다거나 완전히 다른 질문에도 같은 대답만 반복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당장에 '연남 서 식당'으로 달려갔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깝고 고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랑 마침 시간도 맞아서 번개처럼 날아갔다. 5시 전이라 줄서지는 않았지만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이 꽉 차 있었다. 서서 먹는데다 고기가 연탄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속도가 워낙에 빨라서 잡담하고 둘러보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밑반찬이라곤 풋고추가 전부였다.
메뉴에 밥도 없고, 술도 마시지 않는 우리는 그저 허겁지겁 구워지는 대로 고기만 날름날름 주워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고기 맛 좀 안다는 친구도 먹는 내내 맛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 먹고 가게를 나서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기냄새로 철갑을 두른 듯 했다.'나 고기 좀 먹었소!'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어딜 간다는 건 민폐에 가까웠다. 하지만 친구는 "간만에 고기다운 고기를 먹었다"면서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워 했다. 나 역시 이렇게 고기만 배 터지게 먹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 천직은 천직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11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했다는 이대현 사장은 스스로를 1.5세대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는 군병으로 차출되어 거제도로 갔고 당시 신촌은 낮에는 아군, 밤에는 중공군이 장악했다. 어머니는 2남 2녀를 품에 안고 전장의 한가운데서 버텨냈지만 1953년 전쟁이 끝났을 때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죽고 아버지와 이대현 사장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셋만 살아남게 됐다.
아버지는 고구마와 감자를 길러 남대문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전쟁 통에 밭이고 뭐고 다 폐허가 되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게 술을 사다가 잔술을 팔았던 것. 돼지고기 소금구이와 통북어 그리고 소갈비를 안주로 냈다.
"그때는 소갈비가 아주 저렴했어요. 뜯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양반들이 잘 먹지 않았거든요"따로 식당이랄 것도 없었다. 당시 이대현 부자가 살던 신촌 홍등가 골목-현재 그랜드 마트 뒷골목-한옥집 마당에 드럼통 세 개를 엎어놓고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식 선술집의 시작이다.
이 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밥을 취급하지 않는다.
"밥을 하려면 반찬이나 찌개가 따라붙어야 하는데 홀애비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술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술 한잔하면서 그저 안주로 고기 몇 점이면 족한 게 술꾼들의 취향이라는 걸 아셨던 것. 외식업의 한 획은 그은 식당의 시작은 그렇게 미약했다. 환경이 열악하니 장사도 시답잖았다.
그저 밥 세끼만 먹고 살면 되는 시대였던 터라 크게 욕심도 없었다. 그나마도 그냥 놔두면 먹고 살 만은 했을 텐데 전쟁 직후라 무법천지였다. 허구한 날 경찰이 들이닥쳤고 남대문 시장에서 사다가 쳐 놓은 군용천막은 군홧발로 짓밟히곤 했다.
"뭐라고 좀 찔러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걸 바란 거 같은데…. 그런 시절이었잖아요." 그런 시절이었노라고 말하는 나에게 이대현 사장이 농담으로 화답했다.
"나는 백을 싫어해요. 지금도 백은 싫어요. (웃음) 그래서 가방도 안 들고 다닙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학교도 없었고 동생은 너무 어렸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설거지와 잔심부름을 하면서 함께 선술집을 꾸려갔다.
"그 때 심부름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지겹던지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장사가 천직이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던 그는 30대에 외도를 했다. 싸우고 시비 거는 술꾼들이 지겨워 제지업, 이불장사, 장갑도매 등 여러 일을 전전했지만 월급이 너무 적거나 수입이 변변치 않아 결국 식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대형 사장은 공무원이 되고 싶었단다. 아버지를 비롯해 어려운 서민들을 괴롭히던 나쁜 공무원이 많았던 시절이라 좋은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무원 했으면 왕따 당할 뻔 했지. (웃음)"◇ 서서갈비는 손님들의 간판다들 '연남 서서갈비'라고 부르지만, 이 가게의 정식 이름은 "연남서식당"이다. 처음엔 '김포집'으로 불리다가 -아버지 고향이 김포였다- 이어 '실비집'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영업 신고를 하고 간판을 달게 된 이름은 '연남식당'이다.
"우리가 지은 이름이 아니고 영업 신고하러 구청에 갔더니 담당 공무원이 '연남 식당'이라고 신고를 해 버렸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런 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모두들 '연남 서서갈비'라고 부르는데, 왜 가게이름을 바꾸지 않았을까?
"서서갈비란 이름은 손님의 간판입니다. 식당 이름도 없던 시절, 손님들이 약속을 잡으면서 '서서갈비로 와'했던 게 '서서갈비'가 된 거죠. 서서 갈비는 내 간판이 아니니 누구나 써도 상관없습니다." 서서갈비란 이름을 쓰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다.
"궁중 불고기를 너비아니라고 부르는 것처럼 소갈비를 서서갈비라고 부르기를 바랐습니다. 서서갈비란 간판을 달고 있으면 사람들이 '아~소갈비집이구나'라고 인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올해 초 그를 만나러 갔더니 간판이 '연남서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연남식당'으로 영업신고를 해 놓고 간판은 '연남 서서먹는 갈비집'으로 달았다고 고소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잘 나가는 가게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그래서 2015년에 '연남서식당'으로 식당 이름도, 간판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새로 단 간판치고는 너무 예스러웠다. 글씨체도 예전 거랑 똑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바뀐 줄도 모를 것이다.
"15년 전 간판 해준 사람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 사장이 하는 일은 불 관리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서서갈비는 연탄구이다. 이대현 사장은 가게에서 연탄불을 도맡아 관리한다. 사장이 연탄불을 직접 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보다 단순했다. 할 사람이 없고 하겠다는 사람도 없어서란다.
"요즘 사람들은 연탄불을 안 써봐서 그런지 연탄집게 만질 줄도 몰라." 요즘은 숯불구이가 더 각광받고 있지 않은가, 관리도 어렵고 성분도 좋지 않은데 굳이 연탄불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연탄은 불이 꾸준하다는 이점이 있다. 480-500도가 구멍을 통해 일정하게 올라온다. 그런데 숯불은 30분만 활활 탄다. 20분이 지나면 재가 불을 덮어서 화력이 약해진다.
"불이 시시하면 물이 마릅니다. 육즙이 말라 고기가 질겨지죠." 그가 아직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연탄불을 피우고 관리하는 이유다.
이대현 사장은 영수증 정리 등 직원들이 일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대부분 잡일을 한다. 다른 가게서는 신참내기들이나 하는 일을 사장이 도맡아 하는 것이다.
"나는 마부입니다. 경주 말은 뜀만 뛰게 하고, 뒤치다꺼리는 내가 하죠." 직원들이 일 잘 할 수 하는 게 사장의 일이라는 것.
"저희 직원들은 아주 자유롭습니다. 제가 잔소리를 하거나 간섭하질 않아요. 좋은 쌀로 잘 먹이고 월급도 다른 데보다 조금 더 주죠. 시쳇말로 식당계 삼성이라고 하죠. (웃음)" 마부가 경주마를 잘 보살피고 잘 먹이는 건 당연할 터. 말이 잘 달리면 결국 마부가 부자가 될 테니까.
◇ 메뉴는 단순하게연남 서 식당의 메뉴는 단순하다.
"고기 두 대 주세요."그러면 끝이다. 옛날 방식 그대로 '몇 인분'이 아니라 '몇 대'를 기준으로 주문하게 되어있다.
어차피 밥도 없고 찌개도 없고 밑반찬도 풋고추 하나가 전부다. 갈비양념도 반찬 수만큼이나 단순하다. 7가지 양념뿐이다. 파, 으깬 마늘, 볶은 통깨, 참기름, 후추 가루, 설탕, 진간장 그리고 끓이지 않은 생수를 쓴다.
"까칠한 아주머니들은 물을 꼭 끓여서 쓰는데, 생수를 써야 됩니다. 맛이 확실히 달라요." 생고긴가 싶을 만큼 양념 빛깔도 거의 나지 않는다. 손님상에 나오기 한두 시간 전에 재우기 때문이다.
"양념이 음식 맛을 좌우하는 건 싫습니다. 제 장사철학은 최소한의 양념으로 스마트하게 소고기를 먹게 하는 겁니다. 대신 좋은 고기를 구입하죠." '연남서식당'은 국내산 육우와 한우를 섞어 쓴다. 그래도 갈비 한 대 값이 1만5000원(2015년 현재)이라니 참 착한 가격이다.
"우리 집은 의자도 없고 불친절하니까 고기나 제대로 자시라는 의미죠." 고기를 먹은 후 된장찌개나 냉면으로 마무리 하고 싶은 사람들은 미리 즉석 밥과 김치를 준비해 가면 좋다.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다.
"1년만 하고 내년에는 그만둬야지"하면서 매일 매일을 견뎌온 게 60년을 넘겼다. 이렇게 잘 되는 가게를 하면서 왜 평생 사표를 가슴에 품고 살았을까?
"사람들이 술을 먹으면 시비를 많이 걸어요. 식당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거죠. 나이 어린 사람들도 반말을 합니다. 손님이랑 실랑이가 붙어도 늘 잘못은 우리한테 있습니다." 술꾼들 시비에 진저리가 난다는 그는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일하면서 지금의 '연남 서식당'을 만들어 왔는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이 일에 긍지를 갖게 됐다고 한다. '연남서식당'이 보호해야 될 노포로, 원조집으로, 꼭 가봐야 할 맛 집 등으로 인정받으면서 관광공사, 서울시 등이 앞 다퉈 대접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당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본인이 원한다면 모를까 권유하고 싶지도 않다.
"가게 하면서 나는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어요. 왜 이런 일을 하셔서 아들 청춘을 여기에 저당 잡히게 했나 하고요. 그런 일을 굳이 아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들이 원한다면 얘기는 다르다. 자신처럼 불 관리부터 시킬 것이라고 한다.
"근데 이놈이 배운 것도 아닌데 불 관리를 곧 잘 하더라고요. (웃음)"단언컨대 아들은 고기 맛도 누구보다 잘 잡을 것이다. 그게 대를 잇는 식당들의 공통점이니까. 더불어 며느리가 가게에 더 관심을 보인다니 백발백중 아들내외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현 사장은 누구든 식당을 하고 싶다고 하면 말리는 사람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고 평생 휴일도 없고 친구도 만날 수 없는 직업이 식당인데 그런 삶을 권유할 이유가 없죠." 카운터에 우아하게 앉아서 돈이나 받는 걸 꿈꾼다면 아예 식당을 생각을 말라는 게 음식점 주인들의 한결같은 충고다. 직장생활 할 때가 몸도 마음도 100배 1000배는 따뜻하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장사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장사는 꿈도 꾸지 말지니.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