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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장수한의 종교개혁 현장 탐방기

    신간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한편 황제와 교황이 보낸 대사들은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 뉘른베르크 시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특히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종교를 둘러싼 싸움이 위험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1524년 6월 2일 포펜로이트에서 온 농민들이 시청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농민들은 성직자에게 내온 ‘십일조’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곡물을 십일조로 냈을 뿐만 아니라 수확한 모든 과일에조차 십일조를 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아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낸다고 해서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교하는 장크트 로렌츠 교회의 설교자들에게로 몰려들었다. _173쪽 뉘른베르크: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최초의 제국도시

    신간 '종교 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는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첨예하게 대립하던 신앙의 장소를 찾아가 역사를 되짚어보고 진실을 물으며, 그 속에서 지혜를 구하는 여정을 담았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같은 선구자들이 사후와 생전에 화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지나, “오로지 믿음만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시대정신을 표현한 마르틴 루터는 역사상 길이 남을 일대 변화의 포문을 열며,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신앙 개혁 운동이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에서 종교개혁은 그 시대의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치는 전선이 되었다. 사람들의 삶이 교회와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문제에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집약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극단의 대립으로 표출되었다. 파노라마 박물관을 세우게 한 피의 참화 농민전쟁이 아니더라도, 핍박과 대립, 죽음이 드리운 어두운 양상은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의 탄압으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개혁가들은 개혁의 길에서 숱한 위기에 처했으며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암울했던 그 시대에 마르틴 루터는 당대 교회와 성직자가 누리던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 세계로 가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장 칼뱅은 신의 전지전능함과 ‘예정’을 내세워 동시대를 뒤덮고 있던 모든 주술을 타파해버림으로써 합리적인 사회로 가는 변혁의 길을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곧바로 영방 제후들의 권력과 타협하면서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았고, 칼뱅은 자신의 개혁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해 신학을 활용했다.

    개혁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했고, 자신들이 받은 탄압을 다른 개혁 세력들에게 혹은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루터나 칼뱅 같은 주류 종교개혁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던 대안 세력 역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천년왕국’이라는 미래를 선택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현실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한계를 드러내며 좌초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에 자극을 받은 종교개혁은 그 인문주의적 지향을 잃어버리고 개혁의 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상을 드러냈다. 이렇기에 종교개혁은 그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한국 교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갈 길잡이다.

    저자 장수한은 충남대학교에서 역사학 공부를 시작해, 서양사 전공으로 서강대학교 박사 과정을 마쳤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 독일 사회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독일 교회사와 한국 교회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럽 커피문화 기행』(2008), 『그래도 희망의 역사』(2009), 『(사회의 역사로 다시 읽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2016)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산업과 제국』(1984)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선행을 하거나 면벌부를 구매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기만 하면 신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루터의 주장은 종래까지 가톨릭 교회가 강조해온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의 엄수, 성지순례나 성자숭배와 같은 관행, 독신 등 모든 가톨릭 교회의 관습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변혁의 언어였다. 이 점에서 루터의 깨달음은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루터는 자신의 고민을 혼자 안고 있지 않았고, 글로 표현했다. 자신의 깨달음을 알리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_27쪽, 보름스: ‘시대정신’을 심문하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사회계층 역시 확대되고 있었다.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성서가 도시 시민 계층과 일부 농민들의 손에도 쥐어졌다. 루터의 『신약성서』는 당대의 모든 지성인들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당대의 새로운 변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커다란 자극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대척점에 서 있던 요한 코클레우스는 “모든 사람이 이 번역본을 읽고, 그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다”라며 개탄했다. _50쪽, 아이제나흐: 독일어 성서의 산실

    뮐하우젠을 거점으로 한 튀링겐 지역 농민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은 바로 뮌처다. 농민전쟁 과정에 루터를 비롯해 성직자 대부분은 농민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를 ‘흉악범’으로 몰아붙인 뮌처는 농민의 편에 서서 용감하게 설교하고 발언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 참가한 대표적인 성직자였다.
    뮌처는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의 신학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루터의 신앙을 ‘죽은 문자의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루터의 죽은 믿음에 반대해 그는 ‘살아 있는 성령의 신앙’을 추구했다. _57~58쪽, 뮐하우젠과 바트 프랑켄하우젠: 자유를 향한 열망

    나움부르크의 대성당이 보여주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들은 8세기나 12세기에 일어난 이전의 르네상스와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으나, 이제 르네상스 운동은 로마와 그리스의 정신이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권위 있는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 그 중요한 변화였다. 그래서 고대와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살던 시대를 동일시하는 한편, 그사이 기간을 ‘중세’로 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요 관심사가 바뀌었다. 기껏해야 고대의 저작에 관심을 기울이던 이전과 달리, 고전을 통해 인간의 실제성과 가치로 관심을 이동시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르네상스’를 운운하게 되는 근거다. 인간의 존엄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슬픔의 예수="">와 <에케하르트와 우타="" 부인="">은 바로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_86쪽, 나움부르크: <슬픔의 예수="">로 문화 개혁의 길을 열다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신학 대학들은 이 시대에 어떤 대응을 선택할까? 대학의 홍보비를 늘리거나 강사들의 수를 대폭 줄이고 교수들이 더 많은 강의를 맡는 것으로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특히 두려운 것은 오늘의 한국 신학 대학들이 위기를 맞아 정체성 확립을 기치로 내걸면서 근본주의적 신학으로 경도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 본연의 ‘자유’ 정신을 압도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비텐베르크 대학을 비롯해 여타 대학의 역사에서 충분히 확인된 사실 아닐까? _129쪽,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이름만 남은 대학

    종교개혁의 여행길에서 벗어난 일탈이기는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가들을 그토록 엄격히 이단으로 처벌하고 심지어 화형에 처한 가톨릭 교회는 물론이고, 교회의 개혁을 그토록 열망하던 프로테스탄트 교회 역시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력자들의 해외 망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 범죄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한다면, 전쟁 중에 고통을 당한 사람들, 정치적 저항을 택한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교회는 왜 그토록 무자비했을까? 이 극명한 대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_198쪽, <곁길 산책=""> 수도원 가도: 나치의 도망을 도운 성직자들

    당연히 그는 ‘후마니타스’를 문헌 연구와 연결시켰으며, 인문학 연구는 종교와 신앙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라스뮈스는 ‘후마니타스’라는 개념으로 정신교육, 인격 형성, 내면의 종교성 등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스도인의 후마니타스’라는 말을 통해 그는 사회 부문에서의 모범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의 상대적인 고유 가치와 그 존엄성을 새롭게 강조했다. 이는 중세 교회의 인간 이해와 달랐을 뿐 아니라 루터의 ‘죄’ 많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과도 크게 대조된다. 에라스뮈스의 영향은 실로 깊고 넓었다. 그는 루터의 개혁에 용기를 불어넣고 개혁의 도구를 손에 쥐어주었을 뿐 아니라 츠빙글리의 개혁 사상에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칼뱅의 인문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칼뱅이 성서문자주의에 묶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에라스뮈스에게서 받은 자극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_247쪽, 바젤: 에라스뮈스와 유럽 인문주의자들의 고향

    종교개혁 자체가 마녀재판을 더욱 부추겼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종교적 갈등과 종교전쟁 시기에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마녀재판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각기 자기 분파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녀재판의 종식은 종교전쟁의 여파가 잦아들고 새로운 정신적 기풍이 마련되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기다려야만 했다. _306쪽, 에슬링겐: 마녀사냥의 아픈 기억을 역사로 남긴 도시

    루터에 의해 오히려 강화된 반유대인 정서는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가로채고 있다는 의구심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프랑크푸르트는 그 불꽃을 보여준 도시였다. 이 도시의 장인들과 상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주해온 것이 경제 불황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민들의 불만은 1614년 8월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로 이어졌다. 시민들이 유대인들의 집을 약탈했고, 그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도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고 그들은 상업에서 능력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좀바르트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준거라고 본 복식부기를 채택해 금융업에 뛰어드는 등 자본주의적 경제를 선도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그들을 대체할 인적 자원이 아직까지 없었다. 1616년 시의회는 이 반란의 주동자를 처형하고 유대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유대인들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고 반란의 와중에 파괴된 유대인 공동체도 서서히 복구되어 유대인들은 이전의 경제적 위상을 회복했다. _316~317쪽, <곁길 산책=""> 프랑크푸르트: 재등장한 반유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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