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Work, 1964,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0×194cm, 개인 소장
경북 울진의 山 山 山이 추상그림의 이상향이 되어 빛나고 있다. 이 곳 출신의 미술작가 유영국(1916-2002)은 추상작품 60여년의 활동에서 울진의 산과 자연 풍광을 끊임없이 추상회화로 변주했다. 그의 작품들을 대하노라면 삼각형과 원 등 기하학적인 구성과 원색의 색면이 조화를 이루며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적인 평정이 합일한다. 깊이있는 본질의 드러남과 조형적인 질서, 강렬한 색면의 생명력, 그리고 미세하게 차이나는 또는 뚜렷히 대비되는 색면의 교차가 주는 울림들. 화면의 이러한 느낌들은 산과 자연의 살아있는 기운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유영국, 절대와 자유'전을 11월 4일 개막했다. 출품작 109점 중 '산'을 제목으로 한 것이 21점이다. 여기에 '작품'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산을 형상화한 작품이 10점 안팎에 이른다. 출품된 유화작품 중 3분의 1이 산을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출품작 중에서 이 '산' 작품들은 1957년작부터 1999년작까지 지속적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산 이외에도 해, 바다, 계곡, 나무, 바다풀, 아침, 해토, 사람 등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했다.
산 Mountain, 196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29×129cm, 개인 소장
유영국 작가는 왜 그토록 평생에 걸쳐 산을 작품 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는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했다. 산을 마음에 품으면 그 사람의 기상이 산처럼 웅대해진다고 했던가. 작가는 고향 울진의 울울창창한 산의 기상을 내면에 품고자 했고, 그 기상을 화폭에 담아 후대에 전하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건 아닐까. 아름드리 금강송과 계곡이 깊은 불영산의 기상을 말이다.
유 작가가 산을 추상회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산이 기하학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김환기가 자연 속에서 요약된 형태를 만들어간 반면, 유영국은 구성적인 도형 속에서 자연의 원형을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형으로서 삼각형은 절대적인 형태이자 동시에 산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작품 Work, 1967,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0×130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유영국에게 추상작업으로서의 산이 갖는 의미는 개인적, 표현기법적인 것 뿐만 아니라 미술사적, 역사적, 사상적인 면까지 담고 있다.
미술사적으로 그는 왜 추상을 선택했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는가? 이인범 상명대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후반, 예술에 입문하며 그가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절대적이고도 구축주의적인 추상이다. 눈에 보이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실을 수 없던 암울했던 강점기에 그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방식은 구축이다. 그런데 해방 후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연과 삶의 세계에 감정을 이입하며 이 땅과 대지를 노래하는 일에 착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어떤 상황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유 작가는 태평양전쟁 시기인 1943년 일본 생활을 접고 고향 울진에 돌아온다.그리고 한국전쟁으로 피난생활을 한다. 이 시기에 생계를 위해 고기잡이 배를 타고, 양조장 운영을 하며 돈도 좀 벌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이 시기를 작가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
원((円)-A Circle-A, 196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6x136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
이 '잃어버린 10년' 동안 새로운 감각과 몸으로 마주했던 고향 울진의 자연체험은 작품에 반영된다. 1968년 세 번째로 열린 개인전을 개최하며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왜 하필 산만 그리느냐는 물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떠난 지 오래된 고향 울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유영국은 스스로 60세까지 기초 공부를 하고 이후 자연에 좀 더 부드럽게 돌아가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질 무렵 극도의 병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77년(만61세)에 심장 박동기를 달고 살기 시작했으며, 타계할 때까지 8번의 뇌출혈과 37번의 병원입원 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주변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자연의 소박한 서정성을 표현한 것들이다. 산과 나무, 호수와 바다, 지평선과 수평선, 무엇보다 해와 달이 비추이는 화면은 지극히 조화롭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완벽한 '평형상태'를 향해간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세계로 돌아올 때마다 마주친 유영국의 캔버스는 생(生)에 대한 따뜻한 위로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산과 호수 Mountain and Lake, 197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53x65cm, 개인 소장
유영국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인범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추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가능성을 평생에 걸쳐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래서 화가 유영국은 이 대지와 자연, 그 첩첩의 산들과 함께 황홀한 법열, 절대적 자유와 추상의 왕국으로 비상하는 듯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유 작가는 정말 즐겁게, 본인이 좋아서 작업에 평생 끈질기게 매달려 지내며 스스로 지복을 누린다고 느꼈을 것이다. 조형 원리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자기 부정을 하면서 작업하는 과정이 스스로 행복했을 것이다"고 평했다. 이어 "한국의 근대미술사에서 유영국이라는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일종의 자부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그 험난한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삶에서도 예술에서도 최대한 '비극'을 제거한 채 완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작품 Work, 198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5×135cm, 서울미술관 소장
전시 기간: 11.4-2017.3.1
전시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작품: 작품 109점, 아카이브 50여 점
관람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