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10차 변론'을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금껏 10차례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정을 술렁이게 했던 건 16명 증인들의 폭탄 발언이나 답변 거부 못지않게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사이다 질문’이었다.
직접 내비친 적은 없지만 말과 표정이 마음의 창(窓)인 만큼 6일 60일째가 된 탄핵심판 과정에서 재판관들의 입과 얼굴에선 형성된 심증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는 원칙에서 재판관들의 속내를 엿볼 단서는 증인신문이다.
그러나 30년 안팎의 법조 경력을 바탕으로 던진 재판관들의 질문은 진실을 향한 징검다리일 뿐, 8인의 결정이라는 함수가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
◇ ‘꼼꼼형’ 이정미 권한대행…‘교통정리형’ 강일원 주심
강일원 재판관. (자료사진/박종민 기자)
강일원 재판관(국회 여야합의 지명)은 ‘교통정리형’이다.
“이 사건은 형사재판이 아니다. 탄핵심판이다”라는 게 그의 레퍼토리다. 증거조사 절차와 증인채택 기준이 논란이 될 때마다 중재자로 나선 주심으로서의 역할이다.
강 재판관은 지난달 23일 8차 변론에서 박 대통령 측이 39명의 증인을 신청하자 “좀 더 생각해보시죠. 증인들이 나오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지연 의도를 꼬집었다.
KT 황창규 회장이 헌재에 낸 의견서에 담긴 “대통령 측에 불리한 진술을 할 것 같은데 (박 대통령 측이) 왜 신청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는 말도 심판정으로 옮겼다.
증거조사를 담당하는 강 재판관은 6차 변론 때 안종범 업무수첩을 증거로 채택한 뒤 “형사재판과 헷갈리지 말라”며 이에 반발한 박 대통령 측의 거듭된 이의제기에 “중복된 질문에는 답을 안 하겠다”고 단호한 어조로 고개마저 돌렸다.
그리고선 다음 기일에는 “언론에 제가 호통을 쳤다고 보도가 됐던데,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혹시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송구하다”고 박 대통령 측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공정성 시비에 휩싸이지 않기 위한 모습이자 대리인단에 대한 배려였다.
첫 증인으로 나온 윤전추 청와대 행정관의 ‘대통령의 사적인 부분’이라던 답변 거부 명분을 무너뜨린 것도 강 재판관이었다.
신문 도중 보다 못한 그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마치 부정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의심이 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 측이 두둔에 나서자 미리 준비했던 듯 형사소송법 조항을 낭독하며 증언을 독려했던 것도 강 재판관이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이정미 재판관(이용훈 전 대법원장 지명)은 2월부터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맡은 뒤론 증인에게 직접 신문하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질문하라”, “의견은 묻지 말라”며 조율자로서 역할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 재판관은 그러나 3차 변론 당시 이영선 행정관에게는 “위증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장을 날리는 ‘매서운 재판관’이었다.
이 행정관이 ‘최선생’이라고 부르던 최순실씨의 청와대 출입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는데도 “운전하는 차에 태운 기억은 없다”고 거듭 진술하자 “‘맞습니다’, ‘아닙니다’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분명한 증언을 요구한 것이다.
이 재판관은 최씨와 의상실 CCTV에 함께 찍혀 있는데도 최씨를 의상실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이 행정관의 답변이 나오자 “원단, 사이즈, 디자인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 남자가 여자(박 대통령 지칭) 옷을 정할 순 없지 않느냐”면서 “한번 사이즈를 재고 계속 쓴다는 게 납득이 되냐”고 촘촘한 질문까지 했다. 그는 현재 유일한 여성 재판관이다.
◇ ‘찌르거나, 어르거나’ 김이수‧이진성‧안창호 재판관
김이수 헌법재판관.
김이수 재판관은 ‘송곳형’, 이진성 재판관은 ‘돌직구형’, 안창호 재판관은 ‘달래기형’에 가깝다.
김이수 재판관(국회 야당 지명)은 때론 “이건 의견을 묻는 거긴 한데…”,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이란 말로 질문을 시작한다. 직접 경험한 사실을 증언하는 게 원칙인데, 재판관의 위치를 통해 정작 궁금한 증인의 생각을 떠보기도 하는 것이다.
김 재판관은 지난 1일 10차 변론에서 증인으로 나온 김규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이 특공대 투입을 지시했으며 책임론을 부인하자 이렇게 물었다.
김 재판관 : “국가안보실도 긴박한 상황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김 수석 : 대통령이 바로 내려올 심각성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김 재판관 : 처음에는 모를 수 있지만, 대통령이 안 나오면 모셔와야 한다. 직접 구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위기관리센터에 나와서 국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 수석 “우리가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김 재판관은 관저에 머물렀다는 박 대통령의 상황인식에 대해 사실상의 비판을 하며, 김 수석으로부터 “초기에는 상황 인식이 없었다”는 답변을 끌어냈다.
이진성 헌법재판관.
이진성 재판관(양승태 대법원장 지명)은 묵직한 음성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이 재판관은 8차 변론 당시 김종 전 차관에게 “최순실씨를 만나보라고 추천한 인물이 누굽니까. 왜 밝히지 못합니까”라고 다그쳤다.
“그분의 사생활이 있다”는 김 전 차관의 답변이 반복되자, “법정에서 사생활이라며 밝히지 못한다고 거부할 수 없습니다. 누굽니까?”라고 몰아세웠다.
김 전 차관 입에서는 “아, 그렇습니까? 하정희씨입니다”라는 답이 나왔고, 최순실의 측근 실명이 거론되자 대심판정은 또 한 번 술렁였다.
안창호 헌법재판관.
안창호 재판관(국회 여당 추천)은 실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며 박 대통령 ‘호위무사’를 자처한 이영선 행정관에게 증인신문하기 직전 타이르는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라. 그래야 억울한 게 없을 수 있다. 최순실씨가 '억울한 게 많다. 진실을 밝혀달라'고 했다는데 사실을 이야기하라”는 조언부터 꺼낸 것이다.
안 재판관은 ‘매주 일요일 최순실이 문고리 3인방과 회의를 했고, 그때마다 스키야키를 주문했다. 김밥 포장까지 해 갔다’는 한상훈 전 청와대 조리장의 언론 인터뷰를 여러 증인에게 묻기도 했다.
◇ '관조형' 박 대통령 지명 재판관들
서기석·조용호·김창종 재판관. (왼쪽부터)
서기석·조용호(이상 박 대통령 지명)·김창종(양 대법원장 지명) 재판관은 ‘관조형’이다. 10번의 변론에서 서 재판관의 발언 횟수는 4번, 조용호·김창종 재판관은 2번에 그쳤다.
특히 박 대통령 지명인 2인의 재판관은 첫 변론 증인신문 때 침묵으로 일관했다. 본인들의 질문이 선입견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들의 3인 질문은 핵심만 간단명료하게 묻는 ‘족집게’ 형태다.
조용호 재판관은 최순실씨에게 태블릿PC에 관해 묻거나, 안종범 전 수석에게는 재단 출연금이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증액된 과정이 청와대 주도였다는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의 진술과 차이점을 짚어내 신빙성을 확인했다.
김창종 재판관은 이영선 행정관에게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올림머리를, 정호성 전 비서관에게는 최씨에게 청와대 문건이 건네진 것이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건지 물었다.
국회와 박 대통령 측 양 당사자 차례가 끝난 뒤 이뤄지는 재판관들의 증인신문은 애매한 증언을 재확인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양측과 방청석은 8인의 말투와 행간, 표정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탄핵 인용과 기각 결정 사이 어느 쪽으로 저울의 무게가 기울었는지 엿볼 유일한 예측 단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당시 해산 결정을 내렸던 재판관들을 변론 과정에서 청구인 측 법무부를 향해 강한 질타를 쏟아낸 적이 적지 않았고, 유일하게 기각 결정을 내렸던 김이수 재판관은 반대로 통진당을 향해 “밝혀라”는 주문을 적잖게 했다.
이번 탄핵심판에서 말수가 가장 적은 조용호 재판관은 지난해 성매매 처벌법 사건 당시 자발적 성매매자는 물론 성매수자도 처벌하는 건 위헌이라는 의견을 홀로 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며 ‘영자의 전성시대’, ‘레미제라블’, ‘죄와 벌’의 여주인공들을 결정문에 불러낸 그는 “아무런 대가가 결부되지 않은 사랑이나 성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인간본성’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성매매처벌법 공개변론 당시 단 한 차례도 참고인을 향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이 사건 주심이었던 김창종 재판관은 주심으로서 가장 많은 질문을 참고인들에게 던졌던 재판관 가운데 한명이었다.
한 헌재 관계자는 “8인의 재판관 각자의 개성도 있다”며 “질문 횟수가 많거나 적다고 특정 결론을 예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