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우 형, 선의의 경쟁 해보자고요' KIA 양현종(오른쪽)이 27일 SK와 홈 경기에서 6회 김동엽의 큼직한 타구를 잡아 이닝을 마무리해준 좌익수 최형우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고마움을 드러내고 있다.(광주=KIA)
'호랑이 군단'의 토종 에이스 양현종(29)이 올해 프로야구 MVP 구도를 흔들 변수로 떠오를 수 있을까. KIA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며 다승왕과 함께 20승 고지 등 의미있는 기록을 세운다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할 수 있다.
양현종은 27일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SK와 홈 경기에서 9이닝 1실점 완투로 9-1 대승을 이끌었다. 지난 주말 롯데와 홈 3연전 스윕패 이후 3연승 반등의 마무리를 장식했다.
경기 내용도 완벽했다. 양현종은 홈런 1위 SK 타선에 삼진 7개를 솎아내며 안타 3개와 볼넷 2개로 1점만 내줬다. 1실점도 사실 유격수 송구 실책에 의한 비자책점이었다. 사실상 완봉이나 다름없는 쾌투였다.
이날 승리로 양현종은 다승 1위로 올라섰다. 14승째(3패)로 팀 동료 헥터 노에시(14승1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개인 한 시즌 최다인 지난 2014년과 2010년 16승(8패) 경신이 확실해 보인다.
개인 통산 첫 다승왕도 눈앞에 보인다. 2010년과 2014년 양현종은 각각 17승7패의 김광현(KS)과 20승6패의 앤디 밴 헤켄(넥센)에 밀려 최다승 타이틀을 놓쳤다. 양현종의 타이틀은 2015년 평균자책점(ERA) 1위(2.44)가 유일하다.
KIA 양현종이 27일 SK와 홈 경기에서 4년 연속 100탈삼진을 돌파하자 전광판에 관련 기록이 뜨고 있다.(광주=KIA)
만약 다승왕에 오른다면 양현종은 정규리그 MVP 후보로 충분한 자격을 얻는다. 다승왕과 함께 생애 첫 도전이다. 수상한다면 KBO 리그 최고 투수는 물론 최고 선수로 인정받는다.
양현종은 지난 15일 올스타전 당시 정규리그 MVP에 대해 은근한 욕심을 드러냈다. 미스터 올스타보다는 MVP를 노려보겠다는 것. 전반기 13승을 따낸 가운데 팀도 우승권에 들어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사실 양현종이 MVP를 노리는 데는 까닭이 있다. 바로 토종 투수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것. 올스타전 당시 양현종은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타자들이나 외인 투수들과 달리 국내 투수 MVP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 이유를 밝혔다. 각 팀의 에이스를 외인들이 도맡는 상황에서 토종 에이스의 존재감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국내 투수 MVP는 2011년 양현종의 팀 선배 윤석민이 마지막이었다. 2003시즌 뒤 MVP 단골 손님 이승엽(삼성)이 일본 무대로 진출한 이후 국내 투수들은 심심찮게 MVP를 수상했다. 2004년 배영수(당시 삼성)를 시작으로 손민한(당시 롯데), 류현진(당시 한화)이 3년 연속 수상한 뒤 2008년 김광현, 2011년 윤석민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국내외 괴물 타자와 외인 투수가 MVP를 휩쓸었다. 2012, 2013년 박병호(당시 넥센)가 홈런, 타점왕을 휩쓸며 2년 연속 수상했고, 2014년에는 서건창(넥센)이 사상 첫 200안타 위업으로 최우수선수까지 올랐다. 2015년에는 에릭 테임즈(당시 NC)가 역시 최초의 40홈런-40도루를 달성했고, 지난해는 더스틴 니퍼트(두산)가 22승으로 MVP의 영예를 안았다.
'나도 석민이 형처럼' 2011년 프로야구 정규리그 MVP에 오른 KIA 윤석민의 수상 모습.(자료사진=황진환 기자)
올해도 토종 투수 MVP는 쉽지 않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최형우(KIA)의 수상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최형우는 타점(89개), 출루율(4할7푼4리) 1위로 선두 KIA의 핵타선을 이끌고 있는 4번 타자다. 2위인 타율(3할6푼8리), 장타율(6할6푼7리)과 3위인 안타(126개) 중 2개 정도 타이틀을 보탠다면 가장 유력한 MVP 후보가 아닐 수 없다. 홈런 1위(35개) 최정(SK)이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을 세운다면 역시 유력 후보로 떠오른다.
외인 투수 경쟁자도 있다. 다승(14승1패)과 승률 1위(9할3푼3리) 헥터는 이닝(129⅔)도 가장 많이 소화해 투수 중에는 가장 돋보인다. 탈삼진 1위(126개) 메릴 켈리(SK)도 있다. 양현종은 승률(8할2푼4리)과 탈삼진(106개), 이닝(124⅔) 모두 3위다. ERA도 7위(3.54)로 1위(2.84) 차우찬(LG), 2위(2.88) 박세웅(롯데) 등과 차이가 적잖다.
하지만 양현종이 다승왕과 함께 20승 고지에 오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국내 투수 20승은 1999년 정민태(당시 현대) 이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2007년 다니엘 리오스(당시 두산)가 22승, 2014년 밴 헤켄이 20승, 지난해 니퍼트가 22승을 거두긴 했지만 모두 외인이었다. 양현종이 18년 만에 토종 20승을 거둔다면 의미가 크다. 지난해 국내 투수 중 유일하게 200이닝을 돌파했던 양현종이기도 하다.
최근 기세도 좋다. 양현종은 지난달 1일 NC전 2이닝 6실점(3자책) 패전 이후 무패 행진이다. 9경기에서 7연승을 구가하고 있다. 후반기에도 21일 롯데전 6이닝 2실점, 27일 SK전 9이닝 1실점(비자책) 등 상승세를 잇고 있다. 후반기 체력이 떨어졌던 예년과는 다른 올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팀의 남은 50경기에서 10번 이상 등판해 6승을 거둔다면 20승이다.
'모두들 고마워요' KIA 양현종(오른쪽)이 27일 SK와 홈 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둔 뒤 야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격려하고 있다.(광주=KIA)
여기에 그동안 팀을 위해 헌신해온 양현종의 진심이 인정을 받는다면 6년 만의 토종 투수 MVP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 시즌 뒤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은 양현종은 일본 구단의 구체적인 오퍼까지 받았지만 KIA에 남았다. 다년 대박 계약이 아닌 1년 기간을 정한 것은 최형우의 가세 등으로 우승에 적기가 온 호랑이 군단의 정상 등극을 이룬 뒤 다시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팀을 이끄는 에이스의 품격은 27일 경기에서도 드러났다. 양현종은 1회 유격수 최원준이 악송구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뒤 풀이 죽어 있자 손짓으로 웃으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장면이 포착됐다. 2년차 후배를 위한 따뜻한 격려였다.
이후 최원준은 3회 동점 2루타와 역전 득점까지 기록하며 선배의 격려에 화답했다. 자칫 기가 죽었을 후배를 살린 에이스의 모습이었다. 이후 양현종은 5회 최원준이 상대 제이미 로맥의 평범한 땅볼을 더듬다 가까스로 아웃을 만들자 주먹을 쥐어보이며 장난스러운 제스처를 취했고, 최원준은 웃었다. 넉넉히 점수가 벌어진 가운데 보인 여유로운 팀 워크였다.
양현종은 평소 개인 성적을 묻는 질문에 다승보다는 탈삼진과 이닝 1위가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탈삼진은 투수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인 동시에 야수들의 수비 부담을 덜어주는 의미가 있고, 이닝은 불펜을 쉬게 해준다는 뜻에서다. 에이스의 책임감을 분명히 알고 있는 양현종. 과연 생애 첫 MVP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