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갈무리)
"2005년 6월 9일 서울 성북구 I아파트에서 발생한 故(고) 이해령 씨(당시 30세) 사망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시거나, 그 무렵 골프 의류인 '애쉬워스' 브랜드의 여름 재킷 소매 또는 면바지 뒷주머니 단추가 떨어진 남자를 목격하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02-2113-5500, truth@sbs.co.kr"
지난 26일 밤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12년 전 서울의 한 미입주 아파트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을 다루면서, 여전히 미궁에 쌓인 이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인 제보를 전해줄 것을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지난 2005년 6월 16일, 미입주 아파트 안방 화장실에서 심하게 부패된 상태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신원 확인 결과 일주일 전 실종됐던 고 이해령 씨였다. 그녀는 실종 당일 오후 2시 30분께 은행 업무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아무 연고도 없는 미입주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것이다.
사건 현장은 매우 참혹했다. 찢겨진 원피스, 벗겨진 속옷, 뜯겨진 목걸이, 깨진 수납장 유리, 한 움큼의 머리카락. 격렬한 몸싸움과 성폭행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었다.
"성품이 너무 좋았다"고 주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피해자의 몸에서 남성의 DNA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금방 해결되는 듯 보였다. 면식범의 소행이 확실해 보이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 주변 인물들은 모두 DNA가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는 DNA 외에도 범인이 지우지 못한 단서가 있었다. 시신 아래에 깔려 있던 '애쉬워스'(Ashworth) 상표가 적힌 작은 단추 하나였다. 이날 방송에서 제작진은 이 단추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직경 13~15㎜ 크기에 구멍이 두 개인 단추에는 영어로 'Ashworth'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취재 결과 애쉬워스는 40년 전통의 골프 전문 의류로 미국에서는 6년 동안 브랜드 선호도 1위를 기록할 만큼 널리 알려진 제품이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3년부터 2005년 사이 한 대기업이 상표권 계약을 한 뒤 자체 생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지도가 낮고 가격은 높다보니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2년 만에 생산을 중단했다고 한다."
한 골프 잡지사의 손은정 편집장은 해당 단추를 두고 "미국 또는 국외여행을 자주 했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브랜드다. 국외 유학을 했다거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과거 애쉬워스 매장에서 점장으로 근무했던 김일권 씨는 "골프 치는 사람도 입고 일반인도 같이 입을 수 있게끔 나왔는데, 컬러 자체가 상당히 화려하고 남방 같은 경우는 뭐 그때 당시 10만 원대였다"며 "당시 그 금액이면 상당히 고가라고 보시면 된다. (이 브랜드를 찾는 연령대는 나이가) 좀 있다. 거의 30~40대, 50대"라고 말했다.
◇ "거의 오로지 유일하게 단추만이 가공되지 않은 증거로 보인다"
(사진=SBS 제공)
현장에서 발견된 단추가 사용된 옷이 정확히 어떤 색상과 디자인인지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05년 당시 '애쉬워스' 국내 생산 업체 관계자는 "그때의 팀 자체가 없어졌고 그때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저희도 모르는 상황이다. 패션 업계 쪽이 더 그런 게 보관이 잘 안 된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골프 의류를 접해 온 손은정 편집장은 "보통 이렇게 (구멍이 두개인) 일자 단추를 잘 안 쓰는데…. 셔츠에는 단추 구멍이 보통 엑스(X)자이잖나. 근데 이것은 그냥 일자 구멍"이라고 했다. 의상 디자이너 탁은주 씨는 "보통 이런 (구멍이 두 개인) 단추는 정장 재킷, 여름용 재킷이 됐든 아니면 바지 그런 식의 디자인을 넣을 때 쓰는 것"이라며 "힙에 있는 주머니 단추, 그럴 때 많이 쓴다"고 전했다.
구멍이 두 개인 단추는 장식용으로, 여름용 재킷 소매나 면바지 뒷주머니, 또는 여성용 의류에 주로 쓰인다는 것이다. "단추 주인이 남자라면 30~50대 사이 나이로, 경제적 여유가 있고 여름용 재킷이나 면바지를 즐겨 입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제작진의 진단이다.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박지선 교수 역시 "거의 오로지 유일하게 단추만이 가공되지 않은 증거로 보인다. 범인에게서 남겨진, 의도치 않게"라고 설명했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가 입고 있던 물방울 무늬 원피스의 앞자락을 뜯어서 가져갔다. 현금이나 귀중품에는 손도 대지 않은 범인이 유독 원피스 앞자락을 찢어내고 현장에서 갖고 나간 이유에 대해 박지선 교수는 "당연히 피해자의 원피스 앞자락에는 범인이 누군지를 알 수 있는 DNA 정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 역시 "지문 같은 것들은 지금 확인이 안 됐다. 그러니까 아마도 문 손잡이나 이런 데는 그 피해자의 원피스 앞자락으로 지우고 나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방송 말미 진행자 김상중은 "사건 현장을 찬찬히 들여다본 결과 이혜령 씨는 전혀 예상치 못한 범인의 공격을 받은 뒤 사력을 다해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귀걸이, 목걸이 같은 장신구뿐만 아니라 한움큼의 머리카락과 원피스가 뜯겨 나갈 만큼 범인의 공격은 매우 갑작스럽고 포악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지켜냈던 그녀의 죽음이 섣부른 단정이나 추측으로 폄하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 사건의 프로파일링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하나 같이 강조한 것이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현장에 남겨진 DNA가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의 행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년 전 서울 성북구의 어느 거리에서 누군가는 분명 이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은 이혜령 씨와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녀가 어디에서 술(고인의 몸에서는 알콜 농도 0.14%가 검출됐다)을 마셨고, 누구와 동행했는지 알고 있지만, 차마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청년이 재심에서 결국 무죄를 받은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처럼 범인은 누군가에게 이미 자신의 비밀을 털어놨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범인이 현장에서 유일하게 들고 나간 피해자의 원피스 조각을 목격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범인 역시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 섞여 살았을 수 있으니, 그가 즐겨 입던 브랜드와 그 옷에서 떨어진 단추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김상중은 끝으로 "현장에 남겨진 DNA가 정말 범인의 것이라면, 이런 제보들이 모여 범인의 윤곽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이해령 씨. 미처 눈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녀의 한을 달래고,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은 우리 가운데 이웃을 가장해 숨어 있는 범인을 밝혀내 그 죗값을 묻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