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CBS가 1980년 신 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보도기능을 박탈당했다가 1987년 민주항쟁과 함께 보도기능을 되찾은 지 30년이 되는 해다. CBS는 이를 기념해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편집자]
전두환 씨(사진=국가기록원)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내쫓아!"1987년 1월 26일 오후 2시를 앞둔 무렵, CBS에서는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앞서 같은 달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들끓기 시작한지 열흘 조금 지난 때였다. CBS는 이날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주제로 고문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다룬 특집 생방송을 내보낼 예정이었다.
당시 CBS는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방송통폐합 조치로 보도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관련기사☞전두환은 왜 CBS 뉴스를 죽이려 했나?)였다. 생방송 전날 모든 취재를 마쳤던 제작진은 당일 아침 "주제를 바꾸라"는 날벼락 같은 윗선의 지시와 맞닥뜨린다.
이날 생방송에 참여했던 CBS 변상욱 대기자는 "밤새 준비했는데, 갑자기 '(생방송을) 하지 말라'고 (간부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간부들로부터) '사회안정이 중요하다'는 등 뻔한 얘기를 들으며 옥신각신하는데 '안 되면 안 되는 줄 알아!' '음악이나 틀어!'라면서 끝내 방송을 막았다. 결국 평직원 회의가 소집됐고, 직원들이 간부들을 막는 사이 방송을 강행하기로 결정 내렸다. 그런데 우리 계획이 샜는지 간부들이 주조정실에서 진을 치고 있더라. 방송 시간은 다가오는데… 옥신각신하던 중 '내쫓아!'라는 선배의 말에 평직원들이 간부들을 들쳐업고 옆방으로 몰아냈다."
평직원들은 제작팀을 주조정실 안으로 들여보낸 뒤 문을 잠그고, 공권력 투입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서로 팔짱을 낀 채 인간띠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 주조정실 안에서는 캐비닛과 책상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방송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날 생방송은 1시간 15분 동안 이어졌다. 정권의 폭압 탓에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대였기에 사회적 반향은 대단했다.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쳤고 타사 기자들이 몰려왔다.
변상욱 대기자는 "방송을 마친 뒤 '잡혀갈 것에 대비해 솜바지를 준비해야 하나' 논의했다. 민주화 열기가 불붙던 1987년이어서 정부가 바로 잡아가지는 못하더라. 이후 내 경우 성우실에 발령나는 등 제작진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 "전두환정권 표적…택시 타면 항상 CBS뉴스 나왔으니까"
지난 1986년, 한 시민이 CBS 뉴스 부활을 촉구하는 직원들의 결의·선언문을 읽고 있다. (사진=CBS 제공)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으로 불붙은 87년 민주화 열기는 그해 6월 9일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 사건으로 폭발했다. 한국 사회에 서서히 민주주의의 빛이 내리쬐면서, 언론통폐합 이후 꾸준히 이어져 온 CBS 보도 기능 부활 운동 역시 본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당대 CBS 보도 기능 정상화 서명운동·연설 등을 주도했던 김상근 목사는 "CBS 뉴스 부활이 꼭 이뤄져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CBS가 뉴스를 못하게 되기까지, (정권의) 표적이 된 것은 CBS 뉴스의 사회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언론통폐합 이전) 택시를 타면 언제나 CBS 뉴스가 나왔다. 그만큼 중요한 뉴스였다. 모든 청취자들이 주목하는 뉴스, 그러한 보도를 부활시키자는 열망이 컸던 것이다."
급기야 CBS는 1987년 7월 15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5시간 동안 보도 기능을 되찾기 위한 특별 생방송을 진행했다. 이날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 김영삼 민주당 총재, 윤보선 전 대통령은 CBS와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군부독재정권의 비뚤어진 행태를 비판했다.
지난 1987년 당시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이 CBS 뉴스 부활 5시간 특별 생방송을 위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CBS 제공)
특히 오후 6시 30분부터는 예고 없이, 당시로서는 불법이던 'CBS 저녁 종합뉴스'를 기습적으로 내보냈다. 언론통폐합 조치로 시사 뉴스 방송이 중단되고 6년 8개월 만이었다.
당시 특별 생방송을 진행했던 변춘애 CBS 아나운서는 "5시간 동안 섬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뉴스 부활이) 현실화 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권들이 조금이라도 (비판적으로 보도)한 것을 갖고 꼬투리 잡고는 했으니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많았다. 스튜디오 안은 고요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인 방송으로 균형을 잡아줘야만 했다. 듣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마음, 정확한 진실을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지금까지 계속해 온 것 같다."
CBS가 보도 기능을 되찾은 때는 1987년 10월 19일이다. 앞서 5시간 특집 생방송이 나가고 3개월 뒤로, 언론통폐합 이후 꼭 6년 11개월 만의 부활이었다.
◇ 민주화운동과 동행한 부활 여정…"CBS 취재진·마이크 반긴 시민들"
1986년 시작된 CBS 뉴스 부활 100만인 서명운동 현장에서 시민들이 동참하고 있다. (사진=CBS 제공)
5시간 특집 생방송 뒤에도 정권은 CBS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쳤던 까닭이다. 이는 군부독재 통치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보도 기능 부활을 위한 법·제도 정비 등을 주도했던 신현응 당시 CBS 기획실장은 "5시간 생방송을 하던 날은 비가 무척 쏟아졌다"며 "물론 (기습 방송한) 저녁 뉴스는 전파관리법 위반, 그러니까 CBS 허가 취소 요건에 해당되는 사안이었다"고 말했다.
신현응 전 실장에 따르면, CBS는 보도 기능을 빼앗긴 동안에도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갔다. 기독교 전체 의사를 모아 정부·집권당에 건의하는 방법, 청원법에 따라 국회에서 기능 정상화 대정부 건의를 채택해 달라는 캠페인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여의치 않게 되면서, CBS는 마지막으로 1986년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능정상화 100만인 서명운동'에 나섰다.
CBS 뉴스 부활을 위한 서명운동은 관련 대책위가 설립되는 등 교계는 물론 학계·대학가·시민사회단체의 적극적인 동참 덕에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이 주도하는 언론민주화운동으로 번진 셈이다.
서명운동은 이듬해인 1987년 7월 즈음, 1년여 만에 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시민들의 지지는 CBS가 그달 15일에 5시간 동안 특별 생방송을 진행하는 데 커다란 동력을 불어넣었고, 전두환정권이 언론민주화에 목말랐던 국민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도록 압박하는 초석이 됐다.
CBS 뉴스 부활 100만인 서명운동 당시 한 청취자가 "기독교방송이여 영원하라"라고 직접 써서 가두 서명대로 가져 온 붓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CBS 제공)
신 전 실장은 "CBS 5시간 특별 생방송 당시 기습 뉴스는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어떻게 허가 없이 뉴스를 강행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며 "그 뉴스는 사람들이 '이제 전두환은 무서울 것 없다' '힘을 상실했다'고 생각하게 만든 단초였다. 이 일로 당시 전두환 정권이 CBS 허가 취소를 왜 검토하지 않았겠나. 몇 달 뒤 선거(1987년 12월 16일 대선)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손을 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해 12월, 시민들이 6월민주화항쟁으로 쟁취한 첫 직선제 대선이 치러진다. 그런데 선거 당일 서울 구로구청 투표소에서 부정개표함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CBS 뉴스 부활 이후 첫 입사해 대선을 취재했던 민경중 전 CBS 보도국장은 "교육생 신분으로 개표 현장에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특히 구로구청 부정개표함 사건이 벌어졌고, 부정선거 증거물이라고 해서 시민들이 투표함 주변을 에워싸고 대치하는 과정이 있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 (시민들이) KBS나 MBC는 편파방송이란 이유로 현장에 못 들어가게 했는데, CBS 취재진은 유일하게 구로구 투표장에 들어가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민주정권이 수립되리라는 기대감에 시민들이 각 투표소 현장에 부정투표 방지를 위한 참관인들을 파견했다. 그들이 CBS 취재진과 마이크를 반겼던 것이다."
◇ 김대중 "CBS뉴스는 우리 민주주의 산역사"…노무현 "CBS야말로 참 언론"
1960년대 CBS에서 촛불을 밝힌 채 방송을 하고 있다. (사진=CBS 제공)
#1.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한 CBS 뉴스는 독재와 억압에 시달리던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용기를 심어준 희망의 소리였습니다. (중략) 87년의 6·29선언이라는 국민적 승리가 CBS 뉴스 부활의 승리와 함께 왔던 것입니다. CBS 뉴스는 우리 민주주의의 산역사이기도 합니다." - CBS 뉴스 부활 10주년 당시 연설 중에서#2. 고 노무현 전 대통령 "CBS야말로 참 언론입니다. CBS야말로 믿을 수 있는 언론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가꿔 나가야 될 언론입니다. (중략) CBS야말로 정말 재치있게 시대에 잘 맞추어서 온갖 고난을 잘 극복하면서 결국 우리 사회 민주주의라고 하는 큰 틀의 정의의 시대를 만들어내는 데 그야말로 횃불 노릇을 했습니다. 선도자의 노릇을 해 왔습니다." - CBS 창사 50주년 기념식 당시 축사 중에서1987년 열어젖힌 한국 사회 민주주의와 함께 보도 기능이 부활한 CBS는 태생적으로 민주화 투쟁과 결을 같이 해 왔다. 2003년 11월 CBS 인터넷뉴스 서비스 '노컷뉴스'의 탄생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다.
CBS노컷뉴스 탄생을 견인한 민경중 전 국장은 "노컷뉴스라는 이름은 과거 CBS 창립 기념 특집물을 만들면서 1960, 70년대 선배들의 녹음 기록을 듣던 중 떠올렸다"며 "그 엄혹하던 시절 CBS는 야당과 시위대 목소리, 힘 없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실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이어 "CBS는 국민의 목소리를 자르지 않으려 한 투쟁의 목소리"라며 "그러한 의미를 이어받자는 뜻에서 노컷뉴스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겨우내 불타오른 촛불혁명으로 국민들의 언론개혁 요구가 들끓는 지금, CBS를 비롯한 한국의 언론은 '민주 시민들은 언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CBS의 보도 기능 상실부터 부활, 그리고 현재까지를 지켜봐 온 방정배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CBS의 정체성은 저널리즘이다. 한겨레·경향과 더불어 가장 비판적인 공정방송으로서 진실을 전하는 저널리즘 기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며 진단을 이어갔다.
"CBS는 한국의 민주화 도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민주적 기능을 행사했다. 이는 학계에서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고 공인하는 것이다. 우리 방송 역사상 CBS가 걸어온 길은 지금까지도 보도 저널리즘이 걸어온 길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방정배 교수는 "민주화 운동은 물론 동아일보 해직 사태와 같은 사건도 CBS가 보도함으로써 해외 언론에서도 찾아와 다루는 등 세계 여론까지 움직였다"며 "이러한 흐름 덕에 CBS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주화 저력을 잃지 않고 계속 (공정언론의 자세를) 이어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나와 CBS'로 연재 계속>{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