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아인(사진=황진환 기자)
유아인 씨, 안녕하세요.
먼저 26일 긴 글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데 대한 지혜와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앞서 25일 유아인 씨가 누리꾼들과 벌인 SNS 논쟁이, 여러 매체를 통해 어김없이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우려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싸움을 부추기는 듯한 비판 없는 '기사 홍수' 탓에 건강한 토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일부 누리꾼들의 타당한 비판 댓글마저도 묻혀 버리는 모양새였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이른바 '남성혐오'를 당하고 있다는, 다소 모순적인 주장을 해 온 일각의 목소리(그간 유아인 씨에게도 날을 세우던 목소리)가 그대를 옹호하는 흐름을 봤습니다. 유아인 씨의 침묵이 그러한 주장에 편승하고 동조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데도 우려의 큰 지점이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고를 통해 얻어냈을 것이 분명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함으로써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한 유아인 씨의 글은 현명한 귀결점으로 다가옵니다.
"내 이름은 '엄홍식'(嚴弘殖)이다. 내가 짓지는 않았고, 무엇을 심으라고 지으신 지는 모르겠지만 엄할 엄(嚴)에 클 홍(弘), 심을 식(殖)을 덧붙여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는 보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 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으로 한 집안에 태어나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 역할은 있었는데 '엄홍식'은 없었다."
문화 권력을 지닌 남성인 그대가 선택한 길은, 자기 삶의 경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에서 나왔다는 데도 남다른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많은 남성이 스스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비판 없는 혐오를 내세워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확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했죠.
"제삿날이면 엄마는 제수(祭需)를 차리느라 허리가 휘고, 아빠는 병풍을 펼치고 지방(紙榜)을 쓰느라 허세를 핀다. 일찍이 속이 뒤틀린 소년이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상하고 불평등한 역할놀이'. 제사가 끝나면 엄마는 음복상을 차리고 작은엄마와 누나들은 설거지 같은 뒷정리를 함께 도왔다. 집안의 남자들이 '성'에 취해 허세를 피우는 '상'에 여자들이 끼어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한국 사회는 깊이 따져볼 것도 없이, 절대다수인 기층민의 삶이 극소수인 권력자에게 저당잡힌 '기울어진 운동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노동자·여성·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일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약자임이 분명한 우리는, 우리의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한 '혐오' 프레임 안에서, '나'와 같은 약자들의 손을 잡지 못한 채 편가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러한 '혐오'는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유아인 씨는 이러한 물음에도 나름의 답을 얻은 듯합니다.
"전쟁과 종교의 역사와, 각종 인간 사상이 합작하여 빚어낸 남존여비의 '전통'과 그 전통이 다시 빚어낸 인간 사회의 참상은 내 집안에서도 자랑스러운 골동품으로 전시되었다. 유난하고 폭력적인 그 풍경은 뻔뻔하게 펼쳐졌지만 자랑스럽게 대물림되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엄마'라는 존재의 자궁에 잉태되어 그녀의 고통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인간이다. 그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서 뻔뻔하게 살아갈 재간이 없다."
◇ '증오를 포장해 페미인 척'하는 행태는 비판 받을 수 있다지만…
(사진=유아인 SNS 화면 갈무리)
그대의 비판적인 성찰이 개인의 범주를 넘어 사회로 향하고 있다는 데는 특별히 눈길이 갑니다.
"남성과 여성. 다른 유형의 인간들이 전쟁, 종교, 지배의 역사 속에서 가져온 생물학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냈다. 차이를 차별로 전환하는 강자의 폭력은 성의 차이뿐 아니라 모든 개개인이 구성하는 사회 안에서 소수자를, 약자를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인 씨의 긴 글에는, 전날 SNS에서 벌어진 날 선 논쟁에 대한 보다 치밀한 성찰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하는 메갈짓 이제 그만"이라는 그대의 표현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하는 짓은 '약자의 언어'인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 받을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메갈짓'이라는 또 다른 혐오 표현과 등호로 연결되는 데는 커다란 모순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메갈짓'은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하는 짓으로 손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왜?'라는 중요한 물음이 빠져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메갈짓'은 '미러링'(Mirroring·거울로 비추어주듯 상대방의 언행을 그대로 따라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만드는 전략)을 표방해 온 페미니즘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혐오 표현일 것입니다.
유아인 씨가 글에서 강조했듯이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남존여비의 '전통'과 그 전통이 다시 빚어낸 인간 사회의 참상"인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어서) 스스로를 상대적인 강자로 인지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 남성들에게 전하는 '쓴 약'인 셈이죠.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안정화 되면서 '독립은 물건너갔다'는 체념으로 항일 독립운동이 위기를 맞은 시절, 한반도·만주 등지에서 끈질기게 이어진 무장투쟁은, 한반도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한 당위를 부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대 일제와 친일 세력은 이러한 무장투쟁을 '테러'로 규정했죠.
하지만 해방된 이 땅에서의 역사적 평가는 다릅니다. 비약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으나, 한국 사회가 보다 평등해지면 지금의 '메갈짓'이 여성해방운동의 변곡점으로 평가받을 날이 올 수 있다는 여지를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약자의 외침일 수밖에 없는 '메갈리아'를 처음 접했을 때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소설을 가장 먼저 떠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흔히 아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뒤바뀐 가상의 나라 이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는데, 역설적으로 차별받는 현실 세계 여성들의 현실을 오롯이 드러내는 '미러링'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죠.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1977년 발표한 소설이지만, '헬조선'으로 불리우는 40년 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미 읽으셨을 수도 있겠으나, 혹여 접하지 못하셨다면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 치열한 성찰과 숙고로 정교하게 다듬어질 제2, 제3의 '유아인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인 지난 5월 17일 저녁 서울 신논현역 인근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강남역 방면으로 행진를 하는 중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공교롭게도 유아인 씨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날, 청와대가 23만여 명이 청원한, '낙태죄를 폐지해 달라'는 국민들의 목소리에 답했습니다. "내년에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현황과 사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겠다. 그 결과를 토대로 관련 논의가 한 단계 진전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난 2010년 조사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임신중절 추정건수는 한 해 16만 9000건에 달하지만, 합법 시술은 6%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임신중절로 실제 기소되는 규모는 한 해 10여 건에 불과하고요. 세계보건기구(WHO)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06년 기준으로 한 해 2000만 명이 불안전한 임신중절 시술을 받는데, 이중 6만 8000명이 사망했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불법입니다. 지난 1953년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가 제정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20년이 흐른 1973년, 유전적 문제나 성폭행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는 '모자보건법'(제14조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이 제정됐죠.
현재 OECD 회원국의 80%인 29개국에서 '사회경제적 사유'를 포함해 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답니다. 청와대는 "헌법재판소도 다시 한 번 낙태죄 위헌 법률 심판을 다루고 있어 새로운 공론장이 열리고 사회적·법적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문화평론가 손희정 씨는 과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낙태죄는 '생명은 존엄하다'로 접근하기 이전에, 국가에서 무엇인가를 죄로 규정했다는 것을 먼저 봐야 한다"며 아래와 같이 진단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낙태죄는 여성의 몸과 자궁을 분리해 부계중심적인 사고 안에서 '이 자궁 안에는 남성의 아이가 들어있고, 이것은 국민을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사고하는 방식이 들어있다" "태아에 생명이 없다거나 태아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생명이 무엇이라고 규정되는 것이 매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손희정 씨의 말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한 사회에서 생명이 무엇이라고 규정되는 것이 매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아인 씨의 긴 글 가운데 아래의 표현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엄마는 해방되어야 한다. 의문들로 뒤틀린 나는 차마 뻔뻔한 그 풍경들을 뻔뻔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구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된 이 시대가 내게 여전히 의문들을 남긴다는 사실이 나를 증명한다. 의문이라는 고통, 두려움으로 빚어진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낙태죄 폐지 등으로 대표되는, 성평등 문제가 공론화 하는 과정에서 극렬한 사회적 논쟁이 벌어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 강력하던 '빨갱이' '종북' 낙인이 효과를 잃어가는 시대에, 여성·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를 부추기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은 이에 대한 확신을 부여합니다.
"역사가 빚어낸 현재가 우리를 잠식하지 않고 우리를 연료나 부품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우리 스스로 더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도록 각성해야 한다"는 유아인 씨의 당부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약자의 언어인 페미니즘을 따르겠다는 그대의 선언이 보다 치열한 성찰과 숙고로 정교하게 다듬어질 날을 간절히 그려봅니다. 한국 사회가 보다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유아인 씨는 물론 제2, 제3의 유아인 씨가 분명 든든한 동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