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체육대회에 동원된 간호사들. (사진=직장갑질119 제공)
장기자랑 동원과 무리한 추가근무 등의 논란을 계기로 성심병원에서 노동자 조직이 '제대로 역할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재단과 병원 측에서 노조 탈퇴를 종용하는 등 반격을 시도하고 있지만 '더 좋은 직장'을 만들겠다는 노조원들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렬해 보인다.
◇ "재단 지원 끊기면 어쩌려고" 노조 탈퇴 종용하는 병원
춘천성심병원에 근무하는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이하 보건의료노조) 소속 간호사 A 씨는 최근 또 다른 노조에 가입을 종용 받았다. 소속 병동의 수간호사가 평간호사들을 따로 불러 "보건의료노조가 제1노조가 돼선 안 된다"며 무력화되다시피 한 기존 직원 노조가입을 권한 것이다. 병원이 이런 식으로 '재단 눈 밖에 나면' 지원이 끊겨 힘들어질 것이란 게 이유였다.
병원과 재단 측에 문제제기를 하는 보건의료노조는 탈퇴하고 사측에 협조적인 노조에 가입하라고 압박하는 상황은 다른 병동들도 마찬가지다. 보건의료노조 춘천성심병원지부 관계자는 "수간호사가 등이 간호사를 불러내 탈퇴를 종용한다는 제보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동탄성심병원에서는 사측에 협조적인 노조에 가입하라는 원서가 돌기 시작했다. 조만간 새로운 노조가 만들어질 테니, 재단이나 병원에 문제제기를 하는 보건의료노조 대신 여기에 가입하라는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앞서 성심병원은 선정적 장기자랑 동원 등이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자 지난 달 14일 재단 차원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재발방지까지 약속해놓고 뒤로는 문제제기의 주체였던 노조에 대해 반격에 나선 셈이다. 사측에 협조적인 노조를 지원하고 그렇지 않은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일선 기업이 노동자 조직을 압박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성심병원 간호사 B 씨는 "논란이 불거진 후 한동안은 병원이 조용했다"며 "그런데 지난주쯤부터 관리자급 간호사들이 보건의료노조에 가입하는 신규간호사들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고 다니면 어떡하냐'는 말을 하고 다닌다"라고 전했다.
◇ "더 나은 직장 만들 것" 탈퇴 종용에 맞서는 조합원들수 년간 인권과 노동권 침해 속에 숨 죽여 지내왔던 노조는 재단과 병원 측의 반격에도 "이번 만큼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사회적 논란 끝에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등 당국 대응까지 이끌어낸 상황인 만큼, 전무후무한 기회를 통해 재단 측 횡포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병원을 '좋은 일터'로 만들자는 희망도 있다. 보건의료노조 탈퇴 종용을 받은 A씨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이유다.
단적인 예는 폭발적인 노조 가입자 수 증가다. 지난 1일 보건의료노조 산하 한림대학교의료원지부 설립을 공식 발표한 일송재단 산하 강남‧동탄‧평촌‧한강 4개 성심병원의 조직원 수는 4일 기준 1500여 명에 육박했다. 노조 설립 자체조차 생각치 못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지난 2011년 만들어졌으나 10명 남짓한 인원에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웠던 춘천성심병원지부의 경우, 불과 한 달 사이 조합 규모가 30배가 됐다. 사측에 협조적인 기존 노조를 밀어내고 '제1노조' 자리를 탈환한 수준이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제야 우리 권리를 제대로 반영할 노조가 생겼다"는 얘기가 나온다.
◇ "이런 게 노조였구나" 권리 찾는 방법 배우는 조합원들평간호사들이 불합리한 현장의 '증거'를 위해 녹취 등을 적극 활용하는 게 바뀐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이다. 일부 수간호사 등이 면담을 하자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 당당히 녹취를 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직원들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노조의 힘을 새롭게 '배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노조가 사측으로부터 조합원을 보호하는 조직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동안은 감히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춘천성심병원지부는 전 병동의 수간호사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노조 탈퇴 종용 등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법적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부 관계자는 "필요시엔 강력한 대응을 통해 나머지 조합원들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 한림대학교의료원지부 채수인 지부장은 "무리한 추가 근무를 야기하는 화상회의 폐지 등 병원 측에서 좋은 변화가 있다"면서 "'이제 시작'이란 생각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약속한 듯 얘기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