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수로 붓을 쥔 석창우 화백. 그는 "외면과 달리 나의 내면에는 장애가 없다"고 말했다. (사진=석 화백 제공)
평창 겨울 패럴림픽 폐회식이 열린 지난달 18일 강원도 평창올림픽스타디움. 열흘간의 화합 무대를 밝혔던 성화가 꺼지기에 앞서 소개된 영상에는 양 어깨에 의수(義手)를 단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쪽 의수 끝에 달린 갈고리를 손가락 삼아 먹물을 듬뿍 머금은 붓을 쥔 그는, 온몸에 힘을 실어 흰 종이 위에 거침없이 획을 그어 나갔다. 곧 역동적인 움직임을 띤 사람 형상이 드러났고, '하나된 열정'이라는 글이 더해졌다. 끝으로 이 남성은 발가락이 세 개인 왼발바닥에 붉은 물감을 묻혀 종이에 찍으며 작품 서명을 대신했다. 수묵크로키의 대가 석창우(64) 화백이었다.
석 화백은 전기기사로 일하던 지난 1984년 감전사고로 양팔과 왼발가락 두 개를 읽었다. 그는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크로키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화풍과 더불어, 찰나의 역동적인 몸짓을 잡아내는 주제의식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외면과 달리 나의 내면에는 장애가 없다."
그에게 '작품에서 장애와 비장애라는 의미 없는 구분 짓기를 허무는 듯한 전위적인 예술관이 읽힌다'고 전하자 돌아온 답이다.
"나의 내면은 지극히 정상이다. 작품 역시 내면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할 뿐이다. 장애·비장애를 구분하는 것 역시 외면을 중요시 여기는 일반 사람들의 시각일 뿐이다. 그 시각은 '몸이 불편하면 작품도 불편할 것'이라는 편견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이었다. 석 화백은 "손은 내 마음의 형상을 표현할 때 필요한 도구일 뿐"이라며 "그 도구가 불편할 경우 수없는 연습과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 마음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도 했다.
외면의 장애는 없을지 몰라도, '자신과 외모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와 같은, 내면의 장애를 지닌 이들에 대한 뼈있는 비판과도 맞닿아 있는 석 화백의 지론이다.
"예전에 무학스님이 그랬던가. '자기 눈에 보이는 만큼 생각하는 법'이라고. '그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게 그 정도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비좁은 내면이 결국 외면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 자식들 눈에 '뭔가 하는 아버지'로 비치길 바랐던 마음…예술의 길로
석창우 화백이 작품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석 화백 제공)
석 화백은 온몸으로 붓질을 한다. 야구를 할 때도, 악기를 배울 때도 전문가들은 "팔만 쓰지 말고 온몸을 활용하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몸 전체를 활용해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지를 여는 발판이 된다. "내 경우 팔이 없다는 단점이 장점으로 작용한 셈"이라며 석 화백은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 서예를 배울 때 선생님들이 '손목이나 팔꿈치만 쓰지 말고 몸으로 쓰라'고 말한다. 이때 비장애인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손목이나 팔꿈치를 쓰게 된다. 내 경우 아예 팔꿈치 위까지 없다 보니 그걸 사용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몸 자체를 움직여야 (붓질이) 되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필력이다."
그는 작품의 영감을 어떻게 얻을까. "모든 작품의 모델이 사람인지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내 작품 소재가 있다"는 것이 그 답변이다.
"다양한 사람의 동작 중 작품으로 담고 싶을 만큼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몸짓들이 있다. 그것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구해 작품을 그린다. 초기에는 주로 누드를 그렸는데, 요즘에는 다양한 스포츠를 보면서 작품을 구상한다. 누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회전, 점프와 같은 역동적인 동작 때문이다. 예전에 나가노 동계올림픽(1998년) 때 미셸 콴이라는 피겨 선수가 은메달을 땄는데, 금메달 딴 선수보다 몸짓이 훨씬 더 자연스럽더라. '그런 걸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스포츠를 주제로 그리기 시작했다."
석 화백은 이번 평창 패럴림픽에 앞서 2014년 소치 겨울 패럴림픽 폐회식에도 등장해 작품을 선보였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불굴의 예술가'라는 상징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런 예술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며 말을 이었다.
"처음 작품을 하게 된 이유도 자식들 때문이었다. 커 가는 어린 자식들 눈에, 양팔 없이 아무 것도 못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비록 양팔은 없지만 무언가를 하는 아버지로 비치기를 원했다. 나 역시 즐겁게 노력한 결과물이다. 단순히 내가 장애를 극복하고 무엇인가 이루려고만 했다면 지금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뒀다. 이제는 장성해 모두 결혼도 했다. '자녀들이 유명해진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라고 물었다.
"그냥 덤덤해 하더라.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고. (웃음) 아이 때는 관심을 두다가도 성인이 되면 관심 밖이잖나. (웃음) 작업을 하다보면 준비 과정 등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은데, 아내와 아이들이 항상 도와줬다. 아이들 덕에 예술의 길로 들어섰으니 목적은 이뤘다."
◇ 구하라, 주실 것이요…두드리라, 열릴 것이니…"감사하게 다쳤다"
감전사고로 양팔과 함께 왼발가락 두 개를 잃은 석창우 화백은 이 발바닥에 물감을 묻혀 작품 서명을 대신하고 있다. (사진=석 화백 제공)
양팔을 잃은 석 화백을 다시 일으킨 한마디가 있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누가복음 11장 9절). "성경을 읽다가 찾아낸 말씀"이라고 했다.
"비록 외형적으로 팔은 없지만, 내가 하는 일을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하게 하고 있다. 손이 있는 삶 30년, 손이 없는 삶 30년을 살면서 뒤를 돌아봤다. 내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림 역시 처음에는 화실을 찾아갔는데, 안 받아줘서 서예를 배웠다. 그때 일반 화실에서 나를 받아줬다면 필력을 키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나를 거부했던 사람들마저 지금의 내가 있도록 했다는 마음이다."
'원래부터 낙관적인 성격이었나'라는 물음에 그는 "팔을 잃기 전에는 50대 50 정도로 보통 사람들과 같았다"며 답변을 이어갔다.
"다치고 난 뒤 느낀 게 있다. 전기 일을 하면 감전될 확률이 높은데 내가 다쳤다. 그때 심하면 목숨까지 잃는데 내 경우 팔만 절단됐다. 그것도 의수를 딱 낄 수 있을 정도로만. '감사하게 다쳤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다쳤을까'보다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에 집중해 왔다."
그가 폐회식에서 활약한 평창 패럴림픽은, 개막을 앞두고 방송사들이 경기 중계를 턱없이 부족하게 잡는 등 언론의 커다란 무관심과 맞닥뜨렸다.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낮은 인식 수준이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석 화백 역시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었다.
"예전부터 팔 없이 갈고리를 차고 다니면 많이들 쳐다보고 했잖나. 상이군인들로 인해 갈고리가 무서움의 대상이기도 했고….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몹시 경계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끼지만, 여전히 그런 게 있다. 언론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뒤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그 덕에 (사람들이 보는 눈도) 두려움보다는 반가움이 커진 것 같다."
석 화백은 "내가 작업을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장애에 관한 인식도 조금이나마 개선되는 듯하다. 내 몸짓과 작품을 보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많은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서서히 바뀔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 "장애, 내 예술의 일부…같은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장애인 대해주길"
석창우 화백이 작품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석 화백 제공)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한국에는 장애인이 없냐"고 많이들 묻는다. 길거리에서 장애인들을 쉽게 볼 수 없는 까닭이다. 모든 것이 비장애인 위주로 돌아가는 탓에, 장애인들이 쉽게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못 갖췄다는 방증이다.
석 화백은 "만일 국회의원이나 공무원들의 가족 중에 장애인이 한 명씩 있다면 (장애에 대한 인식은) 매우 빠른 속도로 개선 될 것"이라며 "정치인들 가운데 장애인 가족이 있는 사람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가족이 없는 의원들의 활동을 보면, 이런 것에 별 신경을 안 쓴다. 나경원 의원은 자녀가 장애를 지녔다 보니 법안도 내고 한다. 하지만 나머지에게는 관심 밖인 것으로 보인다. 나 의원이 장애예술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장애예술인지원법을 대표 발의했다. 일정 기준을 갖춘 장애예술인들에게 매월 창작지원금을 연금 형태로 지원하는 제도인데, 국회에서 빨리 통과되기를 바란다."
불확실성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는 비장애인 역시 언제 어디서든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이든, 노화에 따른 것이든 말이다. 결국 모든 비장애인은 잠재적 장애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석 화백은 "장애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찾아온다"고 강조했다.
"서울 어느 구에서 장애인시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몸이 불편하고 외모가 다른 장애인이더라도, 사고는 비장애인과 같다. 현재 장애가 없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장애인을 대해 줬으면 좋겠다."
"장애에 대한 인식 변화는 교육을 통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미 편견이 형성된 사람들은 바뀌기 힘들지만,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다.
"최근 미국에 갔을 때 본 것이 있다. 세 살 아이에게 지진이나 불이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교육하는 모습, 장애인학교를 따로 만들기보다는 일반 학교에서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모습. 어릴 때부터 받는 교육으로 장애와 비장애 사이 괴리감은 자연스레 좁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석 화백은 두 팔을 잃고 예술의 길을 열어젖혔다. 그는 "장애는 내 예술의 일부이고, 예술은 내 삶의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장애에 대한 사회 인식이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하나하나 풀어가며 성취감을 얻고 있다. 장애가 있으면 추구하는 무엇을 표현하는 데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 역시 예술을 통해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것이 나를 예술의 길로 이끌어 온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