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정인 교수는 경솔했을지언정 틀린 얘기는 하지 않았다.
문 교수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이 정당화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의 주장을 내심 주한미군 철수를 바란 것이라고 오독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으로 타당하고 현실 가능성이 큰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주한미군의 법적 근거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있기 때문에 평화협정과 무관해 보일지 모른다.
한미방위조약은 '태평양 지역에서의 한미 각 측에 대한 무력 공격'(an armed attack in the Pacific area on either of the parties)에 대처하기 위해 1953년 체결됐다.
비록 북한 위협이 사라지더라도 역내 잠재적 위협이 남아있다면 존치할 필요가 충분한 셈이다.
중국의 대국굴기나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을 볼 때 주한미군 공백이 한반도 안보에 어떤 후폭풍을 부를지 매우 우려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진=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문제로서 평화협정 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직접 언명하며 진화에 나선 것은 누구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현 정부의 보편적인 인식으로 보인다. 북한마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마당에 책임 있는 집권세력이라면 보수·진보를 떠나 달리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평화협정 후 주한미군 지속 주둔이 이런 당위적 요구만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노회한 중국이 (또는 러시아도) 지금이야 가만있지만 어느 시점에는 미군 철수나, 적어도 축소를 거세게 요구할 공산이 크다.
실제로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시 대만 주둔군 철수를 요구해 관철시킨 바 있다. 북한이 주한미군을 용인하더라도 중국의 셈법은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으로선 북한 위협이 사라진 마당에 주한미군이 남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대대적 공세를 취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사드(THAAD) 파동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중국을 상대로 미군 잔류를 설득하려면 지금부터 합당한 논리를 준비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 후, 아니 평화협정 성사를 위해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동북아 평화유지군이 됐든 세력 균형자가 됐든 주한미군 지위와 역할에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새로운 역내 질서에 어울리는 명분이 제시돼야 한다.
설마 중국에 대놓고 '귀국의 잠재적 위협 때문에 주한미군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미2사단-한미연합사단.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문 교수의 문제의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동북아 지각변동으로 인해 주한미군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따져보게 하는 와중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이 1일 "주한미군은 단순히 한반도 뿐 아니라 역내 전체를 안정화 하는 집단"이라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미군 주둔이 북한의 남침 저지를 위해서라는 낡은 신화를 버리고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세계 전략 차원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북한 위협이 제거된 후에도 남아있는 주한미군의 존재는 이런 인식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주한미군이 아무런 대가 없이 한국을 지켜주는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주둔한다는 인식 하에 대등한 관계 설정을 준비할 때가 오고 있다.
하지만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탓하고 다투며 내부 역량을 소진한다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땅을 칠지 모른다.
민감한 시점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주한미군 문제라면 무조건 금기시하려는 태도로는 전인미답의 변혁기를 헤쳐 나가기 어렵다.
한반도의 봄을 맞아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변적 논쟁이 아니라 담대한 상상력과 결연한 행동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