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문화도서관 장훈 이사장이 서울 서초동에 있는 수학문화도서관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수학은 창의적인 인간활동이라는 점에서 문화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사진=수학문화도서관 제공)
"가족이 중국음식점에 갔다고 치죠. 대개 엄마들은 자녀에게 '가만 있어봐. 오늘 짜장면 먹어라' '지난번에 저거 먹었으니까 오늘은 이거 먹어'라고 합니다. '뭐 먹을래?'라고 묻지 않아요."
23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사단법인 수학문화도서관에서 만난 장훈(63) 이사장은 인터뷰 말미에 위와 같이 말하며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아이에게 '뭐 먹을래?' '오늘 왜 그게 먹고 싶어?'라고 묻지 않음으로써 아이가 선택할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거죠. 선택의 전제조건은 생각입니다. 인간의 오만 가지 오묘한 조화 속에서 나오는 '필'(feel), '센스'(sence)예요. 좋은 선택이란 생각을 함으로써 '이렇게 했더니 저렇게 되더라'라는 경험을 쌓는 겁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왜?'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멋진 생각이네'라고 격려해 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며 말을 이었다.
"부모들은 놔두기 싫은 겁니다. 불안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을 투자해야 합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겠죠. 투자 없이 어떻게 멋진 작품이 나오겠어요. 불안을 투자하세요."
30여년간 중고등학교에서, 6년 동안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장 이사장이 "수학을 입시도구가 아닌 문화로 바라보자"고 역설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수학문화'는 수학자로서 고민해 온 핵심 개념입니다. 인간활동과 그 양식을 문화라고 한다면, 수학도 인간활동이라는 이야기죠. 문화에는 예술과 같은 창의적인 인간활동이 포함됩니다. 수학 역시 창의적인 인간활동이라는 점에서 문화의 일부인 거죠."
결국 "수학의 바탕인 '필' '센스'를 길러주면 '로직'(logic)은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우리네 수학 교육은 '필'과 '센스'라는 중요한 과정을 생략한 채 '로직'만 강요하고 있어요. 그러니 수학하면 막연하거나 싫어하는 과목으로 여기기 십상이죠. '왜?'라는 궁금증으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수학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수학문화적 교수학습'이죠."
그는 "어떤 저명한 학자들은 과격하게 '가르치치 말라'고 한다. 이를 뒤집어 보면 결국 '생각할 기회와 시간을 빼앗지 말고 기다리라'는 이야기"라며 "문제를 틀리면 마치 죄 지은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 수학문화적 접근"이라고 설명했다.
◇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수평적인 '수학문화' 사고에 눈뜬 계기"
흥미로운 수학교구를 싣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수학버스' 운전석에 장훈 이사장이 앉아 있다. 대형면허를 딴 그는 수학버스를 직접 몰고 학생들을 찾아간다. (사진=수학문화도서관 제공)
수학문화도서관 1층에는 인류와 함께해 온 수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수많은 수학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지난 2008년 경기 남양주시에 수학문화원을 세운 이래 서울 서초동 수학문화도서관으로 확장시키기까지, 십수년간 수학문화를 전파하는 데 매진해 온 장 이사장을 변화시킨 계기가 있다. 바로 한성과학고에서 수학교사로 있을 때 겪은 일이다.
"충격이었죠. 수학교사로서 그 전까지 나 역시 옛날 방식에 젖어 있었어요. 학생들이 질문하면 '그건 무슨 참고서 예제 몇 번'이라며 풀어주는 게 유능한 교사라고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었거든요. 한성과학고 학생들은 중학생 때 이미 고교 수학 과정을 마치고 들어왔어요. 교과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더군요. 그 학생들의 질문은 나 스스로에게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것들이었죠. '왜 그렇죠?'라는 창의적인 물음에 답을 못하겠더군요."
그는 "그때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교사가 됐다"며 "그때 학생들이 수학을 놀이로 여길 수 있도록 돕는 통합 이론·체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수학문화라는 네 글자를 연구했다"고 전했다.
"처음에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지만, 그 이후로는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좋은 질문이네'라고 말해 줄 여유가 생긴 거죠. 그렇게 학생들과 수평적인 관계가 되니 좋은 질문들을 더 많이 던지더군요."
결국 반드시 답을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함께 문제를 찾아내고 풀어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장 이사장은 "수학교사는 '가이드', 즉 돕는 사람"이라는 말로 이를 뒷받침했다.
"학생들에게 길을 안내하면서 모르면 같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죠. 그래야만 교사도 함께 성장할 수 있어요. 교사로서 철학을 갖게 되는 셈이죠. 전시된 수학교구를 함께 보고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아이들이 문화로서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호응하도록 돕는 것이 수학문화도서관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수학문화도서관이 운영하는 '수학버스'도 이러한 맥락에서 태어났다. 다양한 수학교구가 설치된 대형버스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아이들에게 수학문화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버스는 수학문화도서관에 오기 힘든, 도서지역 등에 사는 아이들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었어요. 버스에 오른 아이들은 '이게 뭐예요?'라고 자연스레 물음을 던져요. 그렇게 수학문화적인 환경에 노출되는 겁니다."
애써 대형면허를 딴 덕에 장 이사장은 직접 수학버스를 몰고 아이들을 찾아간다. 버스를 몰고 온 어른이 직접 전시물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모습은 아이들에게도 흥미로운 광경이리라.
"DMZ(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경기 파주시 대성동 마을에 수학버스를 몰고 간 적이 있어요. 유치원·초등학교 합쳐서 학생 수가 35명인데, 한 유치원생이 수학교구를 만지면서 '이게 뭐예요?'라고 묻는 모습이 너무 감격적이더군요. 수학버스로 먼 곳에 있는 아이들이 잠깐 놀 시간을 만들어 줬다는 데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죠."
◇ "수학은 의문 제기·해결하는 창조적 활동…입시도구로 전락, 우리 세대 잘못"
장훈 이사장이 수학문화도서관 전시실을 찾은 시민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수학문화도서관 제공)
자녀 손을 잡고 수학문화도서관을 찾는 부모들에게서 장 이사장이 자주 목격하게 되는 풍경이 있다.
"자꾸만 가르치려고 하는 거죠. '이리 와봐. 이건 있잖아'라고요. 그러면 내가 조용히 가서 말합니다. '어머니, 그냥 두세요. 알아서 놀게 하세요. 그러다가 혹시 아이가 질문하면 답하시고, 모르겠으면 제게 물으세요.' 아이들은 다른 것에 흥미를 보이는데 부모만 모르는 상황을 보게 되니까요. 부모는 급하니까, 지식을 전해 주고 싶으니까 그러는 걸 이해합니다."
"내버려두라"는 장 이사장의 말을 들은 부모들은 의아해 하기 마련이다. "그때 슬쩍 설명합니다. '아이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만 정말 수학을 잘할 수 있다. 가르치지 말라고 강조하는 유명한 수학교육자들이 여럿 있다'고요."
그는 "학교 수학교육도 마찬가지다. 안달을 하면 안 된다.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일상"이라며 "그것이 바로 문화로서 수학적 사고"라고 역설했다.
"수학적 사고를 통해 문제를 찾고 해결해 오면서 인류가 발전해 온 겁니다. 학교 교육에서 수학문화적 접근이 가능해지면 수학적 사고의 밑거름인 '필' '센스'가 길러지고 '로직'은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과정이 생략된 채 입시도루로 전락한 수학 탓에 상처받고 있어요. 우리 (세대) 잘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모른다" "내 잘못이다"라고 말할 줄 아는 어른의 태도는 감동을 준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한국 사회의 모순을 문제로 인식하고 구성원들이 함께 풀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장 이사장이 그러했다.
"영국의 저명한 교육학자 켄 로빈슨 경은 '학교가 아이들의 창의력을 말살한다'(School kill creativity)라고 말합니다. 과하게 말하면, 학교가 체계적으로 아이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이야기죠. 영어권 학교 교육이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하물며 우리는 창의력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째 뽑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학교가 변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수학문화를 전파하고, 부모들과 함께 캠페인을 벌이고, 언론이 적극적으로 돕는다면 변할 수 있어요."
장 이사장은 "사단법인으로서 수학문화도서관의 정체성을 여전히 찾아가는 길에 있다"며 "해야 할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연구자들 조언도 얻으면 좋은데 예산의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우리가 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엄마들입니다. '엄마들이 변하면 나라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죠. 어머니 회원들을 늘리면서 함께 공감하고 변화를 이끌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수학으로 꿈을 이룬다'는 의미로 '수꿈이' 프로젝트도 벌이고 있습니다. 수학이 입시도구를 벗어나 문화로 작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죠."
그는 "지금 수학이 입시도구처럼 이용되는 바람에 수학의 본질적인 메시지, 정신이 외면받고 있다"며 "결국 아이들에게 공식만 암기하도록 할 뿐, 수학 안에 있는 문화를 보면서 놀라고 기쁘고 공감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마음이 놀라고 기뻐야 호기심도 생기는 법이잖아요. 창의적인 인간활동인 수학을 문화로 접하도록 돕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수학의 정의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본질적으로 수학은 의문을 제기하고 해결하는 학문이에요.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는 문제를 잘 푸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요. 문제를 찾아내는 것, 궁금함을 키우는 능력이 인류 문화와 수학의 출발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