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포인트의 외벽이 인상적인 농촌진흥청 치유농업연구센터. 사진=푸르메제단
치유농업, 농업을 통해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 등에서는 '케어팜'으로 불리며 장애인이나 치매 노인 등을 위한 복지의 한 형태로 보편화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분야다.
그런데 국내에서 생소한 이 치유농업 분야에 국내 최고 전문가가 있다. 바로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 김경미 박사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케어팜에 대해 논의된 바가 없기 때문에 처음 시작하기가 쉽지 않죠. 연구분야에서는 치유농업이 기존의 텃밭 프로그램에 비해 얼마나 나은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요."
전북 완주의 치유농업연구센터에서 취재진을 만난 김 박사가 불모지나 나름없는 치유농업 분야를 개척하는 고충을 토로했다.
◇ 치유농업, 교육과 상담 통해 기존 농업과 차별화그 동안 김경미 박사팀은 대상과 방법을 달리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데이터들이 축적되고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본격적인 케어팜 시스템이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치유농업연구센터에서 개발한 부착식 화분(좌). 실내에서 손쉽게 키울 수 있도록 아래쪽에 물 넣는 서랍을 만들어 간편하게 수분을 공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오른 쪽은 물 만드는 화분으로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자동으로 포집해 물을 주지 않아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개발했다. 사진=푸르메재단
"동일한 텃밭 프로그램이라도 대상에 따라 실제 실행되는 내용은 많이 달라요. 예를 들어 부모가 대상일 경우, 정성에 비례하여 식물의 성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자녀양육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줍니다. 학교 폭력으로 문제가 된 아이들은 가정에서 잘 케어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에는 식물이 잘 자라나는 환경을 만들고 스스로 잘 자라는 것에 집중하도록 수정하며 집에 대한 의미와 연계하여 교육합니다."
김경미 박사는 단순히 노동으로서의 농업과 치유농업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을 제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치유가 필요한 상황을 안고 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농업에는 반드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해요. 즉 수익 창출 외의 명확한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농업활동과 함께 전문가를 통한 교육, 상담을 병행해야 치유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치유농업에 가장 적합한 대상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김 박사는 장애인이라고 대답했다. 자연과 가까운 열린 공간, 농업을 통한 힐링체험, 수확의 즐거움 등은 그동안 장애인들이 가장 접하기 어려운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치유농업 자체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온 복지의 형태예요.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발달장애인에게 특히 적합하죠. 몸이 건강하고 지적능력이 높지만 마음이 병들어있는 정신장애인의 경우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이 약하고 육체노동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 오히려 농업을 지속하기 힘들어요."
◇ 장애인 치유농장 조성, 첩첩산중 그럼에도 농진청에서 진행한 치유농업 프로젝트는 대부분은 일반인들로 한정돼있다.
"우리는 장애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이런 사회에서 치유농업을 장애인 대상으로 운영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치유농업은 장애인시설이구나 하고 색안경을 쓰고 볼 여지가 많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효과가 있는 치유농업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반인 대상으로 먼저 시작하게 됐어요."
점차 사회적 약자를 향해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타 분야 기관과의 연계가 가장 큰 산이에요. 복지 쪽에서는 농업을 잘 모르고, 농림부는 복지서비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죠. 공동연구가 되면 좋은데 치유농업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고민의 수준이 서로 달라 아직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했어요."
장애인 일자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임가공의 단순반복 작업과 비교할 때 농업의 장점은 무엇일까?
"매일 똑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작물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작물의 성장에 따라 환경과 작업방법이 달라져요. 다양한 직무가 있고, 작업을 세분화하면 분업화도 가능하죠. 장애의 특성에 따라 가장 적합한 업무에 배치할 수도 있어요. 매일 변함없이 똑같은 작업을 해야 하는 임가공보다 훨씬 낫지요."
장애인 시설의 기준이 우리보다 느슨한 일본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농업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은 복지서비스로서 농업활동을 하는 수준이지만 농촌의 일손 부족 문제를 사회적 약자의 일자리 창출로 해결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지향점이다. 유럽의 케어팜 역시 같은 목적에서 시작이 됐다.
◇ 돌봄과 직업훈련 넘어 자립으로 향하는 길
김경미 박사는 학교폭력 청소년을 비롯한 다양한 그룹을 대상으로 치유농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푸르메재단
푸르메재단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스마트팜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에 김경미 박사는 지지를 표하며 일본 교마루엔 농장을 꼭 가보라고 조언했다.
"장애인이 쉽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일반인에게 더 좋은 환경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에요. 장애인에게 업무를 주기 위해서는 농작업을 전체의 시스템으로 보고 이 작업을 분할하고 또 그것을 단계별로 세분화해야 해요. 사회복지전문가와 함께 이러한 매뉴얼을 표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죠."
장애인에게 적합한 업무를 파악해 배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농업의 장점이기도 하다. 복잡한 만큼 분업화가 이뤄지면 다양한 업무가 파생된다.
"교마루엔에는 해충 포집기가 있는데 그것만 담당하는 장애인 직원이 있어요. 하루 종일 지켜보다가 몇 시간 후에 교체해야 하는 일이죠. 멍하게 있는 것을 좋아하는 장애인에게 그 업무를 맡겼더니 누구보다 잘 하더라는 겁니다. 참 인상적이었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또 있다. 돌봄과 직업훈련을 넘어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한다면 일반 사람들과 달리 오랜 시간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장애인들을 위한 별도의 임금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명확한 임금체계가 없기 때문에 농장에서 장애인을 고용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요. 아무래도 생산성이 떨어지는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동일한 급여를 지급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일본 농복연계사업에서는 지역 위원회에서 아예 직무별로 임금기준을 정한다. 어떤 한 업무에 대해 기준을 정하고 그 업무가 완료되면 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형태로 몇 명이 일하든, 몇시간을 일하든 상관없다. 농장주 입장에서는 정해진 금액으로 계약된 업무를 완료할 수 있으니 만족스럽고, 수탁을 받은 복지기관에서는 업무에 맞춰 장애인직원을 선발하거나 많은 인원을 투입하거나 작업시간을 늘려 부족한 생산성을 보완하면 된다.
푸르메스마트팜은 장애인들의 좋은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작업과 임금에 대한 문제에 좀 더 집중해서 좋은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농업의 모델을 제시하여 사회적 함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인만큼 앞의 문제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가 됐다.
◇ 푸르메스마트팜, 다양한 수익모델 만들어야치유농장의 비즈니스 모델은 김경미 박사에게도 큰 숙제다. 체험농장의 형태로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시적 체험이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농업활동을 기준으로 부가적 수익을 창출해내는 것이 답이다.
"농업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해야 해요. 케어팜이 많은 유럽국가에서는 사회적 가치가 있는 농장의 생산물이 잘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시민들이 나서 도와주는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부분이 아쉽죠. 사회적 농업에 대한 인식도 깊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