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빌링스 선교사=연합뉴스)
1980년 5월 29일(미국시각) 미국 뉴욕 맨하탄의 리버사이드교회에서 광주 희생자 추모예배가 열렸다.
북미한미인권연합이 주최한 이 예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처음으로 미국사회에 알려졌다.
북미한미인권연합은 한국의 선교사로 파견됐다 귀국한 페기 빌링스(Peggy Billings) 선교사가 이끌었던 단체다.
감리교 목사로 1953년 한국전쟁때 선교사로 한국에 와 태화사회복지관장을 맡는 등 사회복지와 여성,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페기 빌링스(한국이름 변영숙) 선교사가 미국시각으로 지난 19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장례예배는 27일 빌링스 선교사가 살았던 뉴욕의 에피파니(Epiphany) 교회에서 열렸다.
◈1954년 감리교 태화사회복지관장
페기 빌링스 선교사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 1월 24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왔다.
한국전쟁 중 미군 점령하에 있던 태화사회복지관을 되찾고 복지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었다.
1954년 태화복지관장을 맡았던 빌링스 선교사는 빈민층을 위해 복지관에서 야학을 운영했고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일터로 나서야 했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업상담소도 열었다
빌링스 선교사는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지난 2011년 4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만 해도 서울 거리에는 고아와 노숙인이 넘쳐났다. 전쟁 이후 생겨난 다양한 계층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줘야 했다"며 6.25 전쟁 직후 복지관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했다.
빌링스 선교사는 1954~1963년 태화복지관의 6대 관장을 맡았다.
◈5.18 미국사회에 가장 먼저 알려
미국으로 돌아간 빌링스 선교사는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간 북미한국인권연합을 이끌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상황을 미국과 캐나다인들에게 꾸준히 알렸다.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진압작전을 벌인 이틀 후였던 1980년 5월 29일(미국시각) 뉴욕 맨하탄의 리버사이드교회(Riverside Church)에서 광주 희생자 추모예배가 열렸다.
이 예배는 미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열린 5.18 진상보고회였다.
이 보고회는 빌링스 여사가 이끌던 북미한국인권연합이 주최한 것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5.18의 진상을 알리는 첫 사건이었다.
빌링스 여사는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씨 미국생활 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씨는 1981년 4월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숨어 35일을 연명하며 미국으로 밀항했다
빌링스 선교사가 회장으로 있던 북미한미인권연합은 윤한봉씨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등 윤씨의 미국 도피생활을 도왔다.
빌링스 여사는 1993년 5월 윤씨가 한국으로 돌아올때까지 윤씨를 지원하면서 미국사회에 한국의 인권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희호 여사와 함께 여성운동 이끌어
페기 빌링스 선교사는 감리교인이었던 이희호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교류하면서 한국의 여성운동과 민주화, 통일운동을 펼쳤다.
이희호 여사의 여성운동을 하는데 빌링스 선교사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빌링스 선교사의 여성운동과 민주화, 인권, 통일운동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페기 빌링스 선교사는 미국 감리교 세계선교부 여성부와 국제국 책임자로 흑인인권운동을 펼치는 등 미국에서도 활발한 사회운동을 벌였다.
지난 2011년 태화사회복지관 창립 9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던 페기 빌링스 선교사는 "지난 60년 동안 한국은 엄청난 변화를 이뤄냈습니다. 한국인의 활동과 성과를 볼 때 정말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여성과 인권운동을 적극 지지했던 페기 빌링스 선교사는 그가 지원하고 응원했던 한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여생을 보냈던 뉴욕의 트루먼스버그(Trumansburg)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