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현지시간)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미국 LA 더 런던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봉준호 감독과 그의 작품 '기생충'이 큰일을 냈다. 그간 '백인', '남성' 위주로 견고한 성을 쌓아 온 미국 아카데미상에 커다란 균열을 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주류'가 급변하고 있다는 현실을 새삼 각인시킨 까닭이다.
'기생충'은 지난 10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관왕으로 최다 수상작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영화 101년 역사상 처음으로 이 시상식에 진출해 이뤄낸 성과여서 더욱 값지다. 비영어권 영화 첫 작품상, 아시아 영화 첫 각본상 수상이라는 데서 그 성과는 비단 한국영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막상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이날 시상식 주인공은 샘 멘데스 감독 작품 '1917'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편된 서구 가치와 질서를 대변하는 이 영화는, 그간 아카데미상이 추구해 온 만듦새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시대착오적인 고집을 이어갈 수 없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각본상을 탔을 때 이 상과 연계돼 있는 작품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면서도 "감독상까지는 예상 못했다. 아카데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이안 역시 "각본상을 받을 때 작품상이든 감독상이든 하나는 수상할 거라고 봤는데, 작품상까지 수상한 데는 출연진 전체가 빚어낸 뛰어난 앙상블(어울림)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전 세계 영화상을 휩쓴 '기생충'에게 아카데미만 작품상을 주지 않는 것은 자칫 어깃장으로 비쳐질 수 있다. (작품상 수상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했다.
'기생충'이 이뤄낸 쾌거는 변화를 요구받는 아카데미상의 현실을 오롯이 증명하고 있다.
이안은 "아카데미상은 늘 '글로벌 영화상'을 꿈꿔 왔는데, '어떤 작품을 통해 그 길로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라며 "아카데미상 입장에서 예술·작가주의 영화를 대변해 온 칸영화제와 차별점을 갖는 데 있어 상업성까지 겸비한 봉 감독과 그의 작품은 최고의 발판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아카데미상이 '기생충'에 작품상까지 준 것은 '탈(脫)영토화'했던 다른 나라 영화들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재(再)영토화' 작업으로 봐야 한다"며 "할리우드가 '로컬'(local)을 벗어나 세계로 시장을 넓혀 나가려는 전략"이라고 진단했다.
같은 맥락에서 오동진은 "('기생충'이 이룬 성과는)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상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라며 "지난 90여년 동안 백인·남성 중심 영화제로 각인돼 온 아카데미상이 최근 들어 인종·젠더와 같은 진보적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변화하는 세계의 여러 징후를 아카데미상 역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아시아 시장으로 가는 통로로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평가받아 왔는데, 아카데미상이 '기생충'을 통해 다인종·다문화로 표현되는 개방된 영화제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라고 부연했다.
전 세계가 직면한, 극심한 빈부격차를 비판한 '기생충'의 메시지는 이 영화 속 유명한 대사를 빌려왔을 때 '시의적절'했다.
오동진은 "넷플릭스와 함께한 '옥자' 등을 통해 봉 감독은 이미 할리우드에 연착륙한 상태였다. 도약의 시기를 잡으려는 아카데미상 입장에서도 '기생충'은 굉장히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지는 매력적인 작품이었을 것"이라며 "뛰어난 완성도를 바탕으로 양극화 문제에 관한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등에 업은 '기생충'의 미국 내 마케팅 전략은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이안은 "예술로서 영화가 지닌 기본적인 가치는 '저항'이다. 시대 문제를 지적하고 갈등 요인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기생충'은 굉장히 보편적인 서사"라며 "전 세계가 양극화 탓에 몸살을 앓는 현실에서 그에 걸맞은 작품으로 아카데미상은 물론 세계 유수 영화제를 '기생충'이 휩쓸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