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25~19:50)
■ 방송일 : 2020년 4월 16일 (목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박요섭 (4.16 합창단원 시찬 군 아버지), 박미리 (4.16 합창단 지휘자)
◇ 정관용> 방금 들으신 곡, 4.16 합창단의 '네버엔딩 스토리'였습니다. 오늘 세월호 참사 6주기죠. 저희가 그동안 많은 유가족분들 또 유가족 도와주시는 분들과 인터뷰를 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특별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유가족들 또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4. 16 합창단이 있어요. 단원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표현했답니다. “우리는 늘 울대가 막혀서 무대에 서는 세계 유일의 합창단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합창단에 얽힌 이야기들을 또 앞으로의 이야기들 좀 들어보려고요. 2학년 8반 박시창 군 아버님. 합창단원입니다. 박요섭 씨 모셨고요. 어서 오십시오.
◆ 박요섭> 안녕하세요.
◇ 정관용> 이 합창단의 지휘자, 박미리 지휘자, 어서 오십시오.
◆ 박미리> 안녕하세요.
◇ 정관용> 울대가 막혀서 무대에 서는 합창단. 울대가 막히면 소리가 안 나오잖아요.
◆ 박미리> 네.
◆ 박요섭> 네.
◇ 정관용> 그렇죠? 그런데 합창단은 소리를 내야 되잖아요.
◆ 박요섭> 그렇죠.
◇ 정관용> 어떻게 내세요? 울대가 막혔는데.
◆ 박요섭> 막히면 막히는 대로 앞에 서서, 무대에 서서 하다 보면 합창이라는 게 참 묘해서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더라고요. 저희도 울면 앞에 계신, 앉아계신 분들도 같이 울면서 합창곡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울대가 막혔다고 해서 합창을 못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그래요. 언제 만들어졌어요, 합창단.
◆ 박미리> 부모님들이 처음 노래하시는 건 2014년 12월에.
◇ 정관용> 12월.
◆ 박미리> 네, 저희가 특별법이 마무리되면서 시민분들에게 감사 표현을 하는 자리에서 잊지 않을게라고 하는 노래를 처음 부르신 게.
◇ 정관용> 잊지 않을게.
◆ 박미리> 부르신 게 노래를 시작이셨고요. 그리고 이제 합창단의 형태는 2015년 저희가 8월에 세월호 500일 추모 합창제를 광화문에서 했는데 그때가 합창단으로써의 모습의 형태를 갖춘 이후의 활동이 시작이 됐습니다.
◇ 정관용> 합창단 우리가 한번 만들어볼까라는 얘기는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어떻게 나오게 된 거예요?
◆ 박요섭> 처음에 만들어볼까보다는, 그 우리가 세월호 활동하시면서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으셨어요. 그래서 그분들께 뭔가 우리도 좀 보여주고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자. 그중에 그분들 초대해서 하자 해서 거기서 우리가 노래를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라는 얘기가 나와서 저는 그때 활동을 하지 않았었고 가족분들 몇 분이 그렇게 노래를 시작했던 게 그게 처음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 정관용> 그러니까 정식 합창단은 2015년 8월에 첫 출범. 그렇죠?
◆ 박미리> 합창의 형태를 띤 거는 그 이후가 된 거고요.
◇ 정관용> 임원이 몇 명 정도예요?
◆ 박미리> 지금은 유가족하고 생존 부모님 해서 열어덟 분이 계시고 일반 시민분들은 40여 명이 돼서서 총 인원이 50여 명 활동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일반 시민들이 더 많네요.
◆ 박미리> 네.
◆ 박요섭> 네.
◇ 정관용> 그렇죠?
◆ 박미리> 네.
◇ 정관용> 남녀혼성이죠?
◆ 박요섭> 네.
◇ 정관용> 어떤, 남성이 더 많아요, 여성이 더 많아요?
◆ 박요섭> 당연이 여자분들이 많고요. 저희 세월호 활동도 사실은 엄마들의 힘이 없으면 사실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어딜 가나 여자분들의 엄마의 마음이 합창단도 그렇고 세월호 활동도 그렇고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여자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저희들은.
(왼쪽부터) 416합창단 박미리 지휘자 & 합창단원 박요섭 씨 (시찬군 아버지)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제작진 제공)
◇ 정관용> 시찬이 아버님는 어쩌다가 여기 들어가시게 된 거예요?
◆ 박요섭> 처음에 합창하자고 했을 때 저는 표현이 그렇지만 좀 미쳤다고 표현을 했어요. 왜 그러냐면 저희가 그때 당시에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은 상태에서 지금이 노래할 때냐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그 입에서 노래가 나올 수 있냐.
◇ 정관용> 그러게 말이에요.
◆ 박요섭> 진실규명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해야 되는데 나는 노래 못 할 것 같다라고 얘기를 했고 그걸 사회 활동하시는 분들한테도 그 얘기를 했는데, 두 분이 연속해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저한테.
◇ 정관용> 뭐라고요?
◆ 박요섭> 아버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세월호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그리고 연대를 하시려면 노래가 하나의 큰 끈이 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가 1~2년 만에 싸움이 될 게 아니기 때문에 노래도 하나의 방법으로써의 고민 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고 그 말에 동의를 하게 돼서 제가 합창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 정관용> 선뜻 정말 노래 부를 마음이 잘 안 생겼죠? 그렇죠?
◆ 박요섭> 못 하죠.
◇ 정관용> 그렇죠? 이거는 하나의 우리의 무기가 또 될 수 있다. 수단, 도구가 될 수 있다.
◆ 박요섭> 세월호를 얘기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라는 게 더 크죠.
◇ 정관용> 그러니까 유가족이나 생존자 가족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옆에서 많이 힘을 보태주어야 어떤 의미에서는 소리가 더 잘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 박요섭> 네.
◇ 정관용> 시민들은 유가족분들의 노래 부르시는 걸 옆에서 거들고 도와주려고 힘 실어주려고 같이 함께하시는 거잖아요.
◆ 박요섭> 그렇죠.
◆ 박미리> 꼭 노래를 거들어드린다기보다는 저도 이제 부모님들 곁에 처음 갈 때도 그런 마음이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 정관용> 뭐든지 그렇죠.
◆ 박미리> 그렇게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고요. 노래를 부르면서 부모님들 곁에 함께 있어드리는 것. 그렇게 함께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처음부터 지휘를 맡으셨어요, 어떻게 하셨어요?
◆ 박미리> 저는 2015년 500일 광화문 추모합창제를 기획하고 제안하면서 부모님들을 처음 만나뵙게 됐었고요. 그 이후로 계속 매주 월요일 안산으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 박요섭> 아마 이거 같이 하시는 분들 없었으면 지금 4. 16합창단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제가 얘기할 수 있거든요.
◇ 정관용> 그럴 것 같아요.
◆ 박요섭> 왜 그러느냐 하면 저희가 여러 가지 간담회라든지 여러 가지를 하면서 참석을 못하는 경우가 되게 많았어요. 그러면서 정기적인 시간에 그럼 우리가 빠질 수밖에 없고 막 그런 건데. 늘 그 자리를 지켰던 여기에 같이 하시는.
◇ 정관용> 일반 시민분들.
◆ 박요섭> 그래서 우리가 어디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도 그 자리에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들 때문에 유지되고 그렇게 4. 16 합창단이 존재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그때 왜 합창제가 있었다고요, 500일을 맞아서. 그때는 많은 합창단들이 함께했겠어요.
◆ 박미리> 아니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시민합창단이 평화음악합창단이라고 있는데 저는 그 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그 합창단이 이제 그 해에 세월호 추모를 하자라는 뜻으로 기획 공연을 광화문에서 부모님들과 함께 노래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제안을 했었고 그래서 평화음악합창단 공연을 부모님들이 함께하시면서 추모합창제로 추모제를 했던 거죠.
◇ 정관용> 그리고 이제 결성 후에는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합니까? 얼마 만에 한 번씩 모여서?
◆ 박미리> 매주 월요일 일주일에 한 번씩 안산에서 연습을 합니다.
◇ 정관용> 솔직히 말해 보세요. 일반 시민분들이 노래 실력이 좋아요, 가족분들이 좋아요?
◆ 박미리> 저희는 노래 실력으로 노래하는 합창단이 아니기 때문에.
◇ 정관용> 그래도, 그래도.
◆ 박미리> 부모님들 노래 잘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시고요.
◇ 정관용> 그래요?
◆ 박미리> 네.
◆ 박요섭> 아닙니다. 사실은 일반 시민분들이 훨씬 더 잘합니다. 저희는 그냥 묻어가는 겁니다.
◇ 정관용>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시찬이 아버님 노래 잘하세요?
◆ 박미리> 엄청 잘하십니다. 저희 베이스를 맡고 계시는데 베이스에서 제가 좋아하는 저희 합창단 노래 중에 음반에는 없지만 동백섬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거기에 솔로도 맡고 계시는.
◆ 박요섭> 이렇게 항상 칭찬해 주셔서 고래도 춤추게 만드세요.
◇ 정관용> 혹시 노래 실력 때문에 영입 되신 거 아니에요?
◆ 박요섭> 아닙니다, 그건. 그건 아니고 서로의 생각이 맞아서 진상규명 활동이라든지 이런 것들 때문에 모이게 된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굉장히 공연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 박요섭> 네.
◇ 정관용> 그렇죠? 국내외에서. 그렇죠? 조금 소개해 주세요. 어디서 어떤 공연들을 해 오셨는지, 그동안.
◆ 박미리> 한 270여 회 5년 동안 활동 지금 햇수로는 여섯 해가 되는데.
◇ 정관용> 270여 회 공연?
◆ 박미리> 270여 회의 공연을 했고요. 처음에는.
◇ 정관용> 5년으로 치면 1년에 50회가 넘네요.
◆ 박미리>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럼 일주일에 한 번꼴이네요?
◆ 박미리> 네.
◆ 박요섭> 네.
◇ 정관용> 와. . .
◆ 박미리> 거의 공연을. . .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6주기 기억식'에서 세월호 참사 생존자들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이한형기자)
◇ 정관용> 어떻게 그렇게 많이 공연을 하셨어요?
◆ 박미리> 처음에는 이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저희를 불러주시면 부모님들이 어디든 찾아가셨었고요. 그때는 사실 노래 실력이나 이런 것들도 아주 미흡했지만 저도 지휘라고 해 봤자 아주 엉망이었지만. 그렇게 함께 다니는 힘으로 다녔었고 저희가 첫 세월호 이야기가 아닌 곳에 갔던 것은 길원옥 할머님이 오셨던 수요집회, 할머님의 수요집회에 찾아갔었는데 그때 책에도 나오지만 거기에 다녀오시면서 어머님들이 우리가, 우리 노래가 이렇게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라고 마음이 들었는데. 그때 동요를 불렀었거든요. 제가 할머니들에게 동요를 불러드리자 해서 동요를 불렀는데 이런 위로. 노래가 위로가 될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달으신 뒤로 쌍용자동차 긴 싸움의 평택에 가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래를 하고 목동역의 가까운 굴뚝에 파인텍 노동자분들이 올라가 계실 때도 여러 번 찾아와서 노래를 불러드리고 강남의 지금 현재 또 올라와 계시는 김용희.
◇ 정관용> 삼성 노동자.
◆ 박미리> 삼성 노동자 분에게도 찾아가서 노래 불러드리고 그런 것들을 이제 부모님들이 아픈 현장들을 찾아가시게 되더라고요.
◇ 정관용> 그러니까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있는 곳은 세월호 합창단이 함께한다, 이런 공연이 많았군요.
◆ 박미리> 그렇습니다. 또 그 외에도 학교를 이제 찾아가게 됐는데요. 부모님들이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참 힘드셔서 노래 부르기 힘드시겠다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학교의 아이들. 중학교, 고등학생들, 광주의 초등학교 이런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하시고 노래하시고 이렇게 학교 현장도 찾아가고 그랬습니다.
◇ 정관용> 해외 공연은요?
◆ 박요섭> 해외 공연은 해외에 세월호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되게 많으세요. 미주랑 캐나다 쪽, 북미주 쪽에 서로의 마음들이 맞아가지고 저희가 LA부터 해서 샌프란시스코, 그다음에.
◆ 박미리> 뉴욕.
◆ 박요섭> 뉴욕 그 다음에.
◆ 박미리> 토론토.
◆ 박요섭> 토론토까지 해서 이렇게 해서 왔거든요.
◇ 정관용> 미국하고 캐나다네요.
◆ 박요섭> 네네네.
◇ 정관용> 조금 아까 우리 지휘자께서 말씀하시다가 책에도 나왔지만 이런 표현을 쓰셨는데. 이번에 책을 내셨더라고요. 제목이 노래를 불러서 내가 온다면. 책은 어쩌다가 내시게 된 건지.
◆ 박미리> 음.. 이게 공연을 다니시면서 현장에서 부모님들의 노래 그리고 세월호로 만들어진 추모곡들을 좀 더 찾는 이런 활동가분들이 많으셨어요. 있으면 우리가 함께 노래 부르고 싶다 해서 저희가 언젠가는 음반을 기록해야 되겠다라는 것은 몇 해 전부터 쭉 이야기가 있었는데. 작년 2019년도에 이제 저희가 음반을 만들자라는 부모님들의 의견을 받아서 고민 끝에 결론을 하고 이렇게 책과 함께 내게 된 거는 음반에 소리만 담기에는 저희가 너무 이야기가 많아서 좀 더 노래와 함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같이 실어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래서 북CD 형태로 이렇게 내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 416합창단 지음/김훈 김애란 글 (사진=문학동네 제공)
◇ 정관용> 북CD. 그러니까 음반도 있고 책도 함께. 그렇죠? 제목이 노래를 불러서 내가 온다면. 4. 16 합창단 지음 그리고 그 옆에 김훈, 김애란 글. 소설가 김훈 씨, 김애란 씨 두 분도 함께하셨죠? 이 두 분은 어떻게 함께하시게 됐어요?
◆ 박미리> 저희가 이제 이야기를.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쭉 담는데 외부의 시각. 세월호의 이야기하고 있는 작가분들 그리고 외부의 시각에서는 4. 16합창단을 어떻게 바라보실지 이런 것도 좀 궁금했고요. 그래서 이제 작년 북CD 형태로 만들자고 결론을 지은 후에 바로 곧바로 김훈 작가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직접 연락을 드렸고 김훈 작가님이 워낙 부모님과의 만남도 많으시고 그동안 쭉 동거차도에서 머무르시면서 함께 생활도 하셨고 안산에 정부합동소를 찾아오셔서 부모님들과도 이야기 하시고 매 주기마다 칼럼도 쓰시고 세월호에 관한 관심이 높으셔서 그분이 일단 가장 먼저 떠올랐고요. 그래서 직접 연락을 드렸고 김애란 작가님은 저희 북CD를 함께한 문학동네 측에서 추천을 해 주셔서 두 분이 함께 하시게 됐는데 연락드리면 아주 두 분 다 흔쾌히, 기꺼이 글을 써주시겠다고 했었고 이 자리를 빌려서 이런 말씀에 조금 감사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분들이 원고료라고 하죠. 고료와. . .
◇ 정관용> 받으시겠어요?
◆ 박미리> 그러니까요. 다 저희 세월호 활동에 기부하시겠다고 해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 정관용> 김훈 선생께서 이런 표현을 썼더라고요.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의 슬픔을 감싸서 슬픔을 데리고 슬픔이 없는 나라로 가고 있다, 이런 표현을 쓰셨는데. 어떠세요, 이 표현 보시고.
◆ 박요섭> 깊은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이 들고요. 확실히 소설가 분이시라서.
◇ 정관용> 다르기는 다르죠.
◆ 박요섭> 표현하는 게 저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표현을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 정관용> 그런데 정말 슬픔을 데리고 슬픔 없는 곳으로 가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계세요?
◆ 박요섭>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옆에서 보셨을 때는 그렇게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그냥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 아이들한테 부끄럽지 않게, 우리 아이들의 원하는 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지 지금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는 건 없어요.
◇ 정관용> 정말 솔직하게 노래를 같이 그래도 모여서 함께 부르고 그러다 보면 그래도 좀 슬픔이 좀 줄어듭니까? 그런 느낌이 있으세요, 어떠세요? 전혀 그거랑 관계없어요, 어때요?
◆ 박요섭> 노래에 가진 힘은 있다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맨 처음에는 노래 가사 한 줄도 못 불 정도로 울다가 연습이 끝날 정도로 그렇게 그런 경우가 많았고요. 마음이 이제 계속 다져지고 다져지면서 그런 노래들을 부르게 됐다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 슬픔을 극복했다라기보다는 마음을 다진다고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 정관용> 마음을 다진다. 그것도 서로서로 함께하니까 혼자가 아니라 합창의 힘으로. 서로서로 마음을 좀 다져주는 그런 효과겠군요.
◆ 박요섭> 네. 옆에 계실 분 아니면 저희가 이렇게 할 수가 없죠. 절대 할 수 없어요.
◆ 박미리> 저희가 볼 때는 부모님들 처음 뵀을 때 표정과 눈빛과 이런 모습에서 많이 달라진 거를 사진 속에서도 그렇고 느낄 수가 있는데요. 저는 처음에 2015년도에 부모님들을 찾아뵈러 갔을 때 그때는 아이를 잃은 슬픔도 크시지만 사회로부터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으신 상황이어서, 참사 초기라서요.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경계하는 느낌이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분들 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건 그냥 묵묵히 곁에 있는 것밖에 없겠다, 이런 마음이었는데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오히려 저희가 다 배움이 크다고 한결같이 단원들이 이야기하시거든요, 부모님들 곁에 있으면서. 이제 월요일날 연습을 가면 저희가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이게 또 공연을 장거리 공연으로, 지방공연 이렇게 가면 1박 2일 갈 때도 있고 같이 잠을 자기도 하고 또 장거리로 이렇게 버스를, 단체버스로 움직이다 보니까 가족이 돼서 훨씬 가족보다 더 많이 보죠. 밥도 더 많이 같이 먹고. 그래서 부모님들이 저희에게 주는 것들이 훨씬 더 큽니다.
◆ 박요섭> 저희는 또 반대로 또 받는 게 너무 많거든요. 배우는 것도 너무 많고요.
◇ 정관용> 아무래도 슬픈 노래가 더 많죠? 레퍼토리 중에?
◆ 박미리> 초반에는 거의 그랬고요. 저도 노래 선곡을 하면서 때마다 어떤 곡들을 부모님들이 부르실까 고민을 해서 이제 악보를 들고 가는데요. 항상 들고 갔을 때 부모님들의 반응을 보거든요. 이 노래를 지금 부를 수 있겠다. 이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이런 것들이 바로바로 이렇게 감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초반에는 좀 힘드시지만 또 제가 끝까지 밀고 갔던 곡도 있고요. 그래도 기어이 불러내실 거라는 그런 믿음으로.
◇ 정관용> 어떤 거요, 예를 들면 어떤 거?
◆ 박미리> 음반에 들어 있는 어느 별이 되었을까, 이런 곡은 노래 시작이 이제 서쪽 하늘에 있나라고 시작을 해요. 그래서 그 한마디 뱉기가 굉장히 힘드시고 거의 눈물을 흘리시는데 그래도 이 노래는 끝까지 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 정관용> 조금 좀 경쾌한 이런 노래들도 합니까?
◆ 박미리> 네, 그래서 이제 최근에 한 2년 전부터는 제가 리듬이 있는 곡, 힘 있는 곡 그리고 저희가 현장에 많이 다니니까요.
◇ 정관용> 그렇죠.
◆ 박미리> 더 아픈 노동자분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어서.
◇ 정관용> 맞아요, 맞아요.
◆ 박미리> 힘찬 노래들 이런 것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부모님들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눈빛과 표정이 또 달라지시더라고요.
◇ 정관용> 그렇죠. 지휘자께서 약간 신나고 경쾌하고 남 힘 북돋아주는 그것 좀 많이 하세요, 좀.
◆ 박미리> 네네, 앞으로는 그럴 생각입니다.
◇ 정관용> 앞으로도 계속 가죠, 4.16 합창단은?
◆ 박요섭> 네, 저희는 계속해야 되고요. 물론 4. 16 활동이 혹시라도 진상규명이 되고 그게 끝난다 할지라도 저희는 계속 할 생각입니다.
◇ 정관용> 합창 대회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거기 좀 나가셔서 실력으로 한번 금메달도 좀 따시고 어때요?
◆ 박요섭> 저희 합창단은 100% 아마추어들이고요.
◇ 정관용> 아마추어들끼리만 하는 곳도 있어요. 그렇죠?
◆ 박미리> 세월호를 알릴 수 있다면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습니다.
◇ 정관용> 당당한 하나의 합창단으로서 합창 대회에 가서 다른 아마추어 합창단원들하고 같이 한번 겨루기도 하고 말이죠. 이렇게 활동하셨으면 좋을 것 같아요.
◆ 박미리> 지금 요즘은 전국민주시민합창 축전이라고 전국에 있는 시민합창단들, 아마추어합창단인데. 합창단들 10개 넘는 합창단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합창축전을 하는데 그 자리에 부모님들이 지금 3년 하셨고 올해도 이제 5.18 40주년 기념으로 저희가 하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연기되기는 했지만 그런 자리에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왕성한 활동 기대하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박요섭> 감사합니다.
◆ 박미리> 고맙습니다.
◇ 정관용> 지휘자 박미리 씨 그리고 박요섭 씨 함께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