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을 맞았다. 당시 신군부의 진압과 무차별적인 집단 발포에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또 다쳤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1997년 전두환씨와 노태우씨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 선고됐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22일 이들을 특별사면했다. 전씨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다시 광주 법정에 섰지만,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 사이, 당시 시민군과 시민을 향한 차별과 혐오는 별다른 제지 없이 계속되고 있다. 현장의 진실을 목격한 데서 오는 트라우마부터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에서 오는 고통까지. 5·18 시민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CBS노컷뉴스가 당시 광주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원이었던 강철수씨(63·왼쪽)의 모습. 강씨는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증거로 제시한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사진=강철수씨 제공)
"내가 시민군이던 때, 내 친구는 계엄군이었다고 하더라고. 고향 친구들이랑 모인 술자리에서 나중에 알게 됐어. 그저 간첩이라고 때려잡으라고 하길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고…그래, 너 가해자 아니다. 너도 피해자다. 그 친구랑 1년에 한두 번 연락해요. 잘 지내는가, 몸은 어떤가. 둘 다 5·18 얘긴 일절 안 해요.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된 거야"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군 조사부장을 지낸 22살 청년은 세월이 흘러 62세 서울의 한 대학교 경비 노동자가 됐다. 머리는 벗겨졌고 눈가 주름은 깊게 팼지만 40년 전 '그날'의 기억만은 또렷하다.
김준봉(62)씨는 5월만 되면 가슴이 아리다. 10일간의 항쟁에서 보고 들었던 상황들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생생히 떠올라서다.
당시 광주의 모 시멘트 회사에서 근무했던 그는 출근길에 광주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방송을 듣게 됐다. "광주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는 당시 운동권도, 교육을 받은 학생도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시민군에 동참해 치안질서반, 조사부에서 투서 벽보를 찢은 사람 등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발포에 죄 없는 시민들이 고꾸라졌다. "어머니"를 외치며 죽어간 남성,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계엄군은 시민군이 있는 건물에 잠입했고 김씨는 계엄군에게 잡혀 5공 보안대 광주분소에서 고문을 받았다. "빨갱이", "누구의 지령을 받았냐"…혐오와 비난, 온갖 폭력이 쏟아졌다. 그때 얻은 고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차라리 총을 쏴 죽여버려라. 그때 제 심정이 이랬어요" 김씨가 말했다.
그는 1년여간의 상무대 영창, 광주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이듬해인 1981년 4월 3일, 계엄사령관의 특별사면으로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내란죄'라는 빨간 줄은 그를 따라다녔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취업은 되지 않았다. 결국 형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도왔고, 이후 자영업 등을 전전했다. '노가다'라도 뛰는 날이면, 몸 곳곳이 아팠다. "고문으로 몸이 상했고, 트라우마도 앓아 광주 동지들 대부분이 이래요.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정신질환을 앓거나, 심지어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 5·18 그 이후, "고통은 현재진행형"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 조사부장을 지낸 김준봉(62)씨가 지난 14일 CBS노컷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박하얀 기자)
5·18을 겪은 광주 시민과 시민군 등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5·18유족회 집계를 보면, 5·18 관련 정신질환 생존자는 65명이고 사망자는 61명이다. 계엄군에게 맞거나 성폭행을 당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들이다.
지난 2012년 설립된 광주 트라우마센터에 등록된 회원은 지난 2월 기준 590명. 센터 정기 프로그램 이용자는 80명가량이다. 센터에 따르면, 이 가운데 5·18 관련이 80%를 차지한다. 대다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앓는다. 알코올 의존, 가족관계 갈등, 경제적 어려움, 사회생활의 어려움 등을 호소한다.
광주 트라우마센터 명지원 센터장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아예 회피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기억과 상처를 누르고 사는 분들이 많다"며 "책임자 처벌 등 진실이 계속 규명되지 않아 (고통이) 30~40년 동안 방치됐다. 왜곡, 폄하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도 심각하다"고 전했다.
우울감은 이들의 가족에게도 전이된다. 하지만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 탓에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숨는 이들이 많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시민군이었던 강철수(63)씨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시민군들이 죽는 과정, 시민들이 죽어서 도청 앞에 있는 과정을 생생히 봤기 때문에 자꾸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고 털어놨다. 강씨는 "수면제 등 약물을 복용하며 고통을 호소하는 동기들이 많다"고 전했다.
5·18을 둘러싼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은 이들의 고통을 더하고 있다. 지난해 5·18기념재단과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최근 10년간 46개 채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0여건의 5·18 왜곡 영상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지난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강씨는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씨가 당시 광주에 왔던 북한군이라며 공개한 사진 속 인물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광주 사태를 믿지 않고 폭동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며 "폭도로 몰고 사실을 날조하는 이들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40년 지났지만 혐오는 이어져…"'차별금지법' 제정해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 조사부장을 지낸 김준봉(62)씨가 지난 14일 CBS노컷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박하얀 기자)
5·18 시민들은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진상 규명'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5·18 관련 역사를 왜곡하고 유공자들에 대한 혐오 표현을 일삼는 이들을 형사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부 극우 논객들의 주장에 정치권까지 동조하고 나서면서, 더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악의적인 역사 왜곡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일부 국가는 역사 왜곡 행위가 차별·혐오 등과 연관될 때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의 조항을 별도의 법률이나 형법 조문에 두고 있다.
독일의 이른바 '홀로코스트 법'(형법 제130조 3항 규정)이 대표적이다. 국가사회주의(나치) 지배 하에서 저질러진 집단학살을 찬양·부인·경시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앞서 우리나라 국회에서도 5·18 등 역사 왜곡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이 몇 차례 발의됐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에 수년째 법안 발의와 자동 폐기를 반복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 5·18 관련 차별 행위와 혐오 표현에 간접적으로나마 제동을 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 지향성,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이다. 한국의 경우 2007년 유엔 인권 이사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이후 2007, 2010, 2012년 등 3차례에 걸쳐 입법이 시도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박한희 변호사는 "형사 처벌을 위주로 하면 모든 게 가해자 책임인 것처럼 되고 사회 구조는 바뀌지 않는 문제가 있다"며 "차별을 용인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5·18 시민군과 개인의 사상, 신념은 보호해야 하는 부분"이라며 "차별 금지 사유로 언급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숙명여대 법학부 홍성수 교수는 "법에 직접적으로 규율되는 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역사 왜곡 자체만으론 처벌할 수 없다"면서도 "5·18 희생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호남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연결된 지점이 보인다. 그럴 때 '문제 영역'이 돼 규제법 적용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