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eNd'(엔드)가 지난 7일 낮 서울고법 앞에서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법원의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사진=이은지 기자)
배가 고파서 달걀 18개를 훔친 남성과 세계 최대 아동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한 남성의 죗값은 '징역 1년 6개월'로 같았다. 적어도 한국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판단 결과는 그랬다. 사법부는 지난 6일 세계 최대 아동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W2V)' 운영자 손정우를 미국에 인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앞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친 손씨는 서울고법의 인도 불허 결정에 따라 곧바로 석방됐다.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에누리 없는 '강력 처벌'을 요구해온 시민들과 여성단체들은 법원의 판결에 분노했다. 손씨에 대한 미국 송환이 불발된 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관련 판결을 내린 '강영수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을 청원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7일 오후 6시 기준 36만명이 넘게 동의했다.
시민들은 "대한민국 법원은 송환 요청 불허를 통해 무엇을 지키려고 했냐"며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바라보는 사법부의 인식 변화 없이는, 'n번방 방지법'도, 잠입수사도 무용지물이라고 비판했다.
◇"사법부도 공범이다"…法 향한 분노
지난 7일 '웰컴투비디오'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며, 한 시민이 서울고법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이은지 기자)
"사법부도 공범이다. 대한민국에 정의란 없다. 한국 사회가 여성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많은 성범죄자에게 '솜방망이'식 처벌을 하며 그들을 보호해준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마스크를 쓴 채 검은 옷차림을 한 이들의 성난 목소리가 법원 앞에 울려 퍼졌다.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팀 'eNd'(엔드)는 이날 오후 서울고법 앞에서 '손정우 미국송환 불허 규탄연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사법부 판결은) 재판부의 오만이자 착각"이라며 "재판부가 과연 정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곳인가"라고 일갈했다. 이어 "검거된 W2V 국내 회원 235명의 사법처리 결과를 추적했을 때, 법원 선고까지 이어진 것은 손정우를 포함해 불과 43명뿐이었다"며 "이 숫자에서도 실형으로 이어진 가해자는 손정우를 제외하곤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최근 사법부가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들에게 내린 선고 사례를 나열했다. '갓갓'의 공범이자 '오프남'으로 불리는 남성에게 대구고법은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검사는 항소조차 하지 않았다. 아동·청소년 이용 성착취물을 제작한 A씨에게 대전지법은 "외모 콤플렉스로 인한 경솔한 판단"을 선처 사유로 들며 감형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시위자들은 "재판부의 기만과 오만한 판단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처벌받게 해달라던 손정우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리고 그를 기어코 한국에 남게 한 재판부는 더욱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법원의 판결을 거듭 성토했다.
'내일의 범죄자에게 용기를 주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손씨의 인도절차를 언급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말을 콕 집어 "정부 또한 재판부의 이번 결정을 방관할 경우 발언에 대한 책임과 질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무엇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나…재판부 판결문 뜯어보니
지난 7일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법원의 결정에 분노한 시민들이 서울고법 앞에서 사법부를 비판하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사진=이은지 기자)
서울고법은 미국의 요청으로 검찰이 손씨를 상대로 낸 범죄인 인도심사 청구를 6일 '불허'했다. 지난 5월 "벌 받더라도 한국에서 받게 해 달라"며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 중앙지검에 아들을 고소한 손씨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진 셈이다.
손씨는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경까지 W2V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3055개를 올렸다. 또, 회원 4037명에게서 7293회에 걸쳐 비트코인을 지급받아 범죄수익 4억여원을 챙겼다.
미국·영국 등 국제적 수사공조로 손씨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국적 등 신원이 확인된 회원 346명 가운데 대한민국 223명, 미국 53명 및 기타 50명으로 파악됐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보다 근본적으로 이 같은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관련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나 잠재적인 제작자가 되거나 새로운 관련 사이트의 운영자를 등장시킬 수 있는 W2V 사이트 회원들에 대한 철저하고 발본색원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며 손씨를 한국에 남겨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대한민국이 범죄인의 신병을 확보해 주도적으로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관련 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철저히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이 이용자들에 대한 수사를 다시 진행할 수는 없다. 법원 판결 이후 검찰·경찰은 "이미 끝난 사건을 다시 추가 수사하라는 것이냐"는 등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재판부는 "범죄인 인도 제도의 목적은 '범죄의 예방과 억제'"라며 "범죄인을 인도함으로써 법정형이 더 높은 청구국의 형사법에 따라 범죄인을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 이 사건 조약이나 범죄인 인도법의 기본 취지나 입법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여죄에 대한 추가수사를 위해서라도 손씨가 한국에 남아야 하며, 청구국에서 보다 높은 법정형이 기대된다는 이유로 송환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인도심사는 단심제라 불복 절차가 없다. 물론 아직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돈 세탁' 혐의로 손씨를 국내에서 처벌할 수도 있지만 형량 차이가 크다. 미국에서는 이같은 범죄로 최대 20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죄가 인정된다 해도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뿐이다.
다수의 성폭력 사건을 맡아 피해자를 변론해온 이은의 변호사는 "재판부의 고민도 이해하고 결정문 자체에 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결정문 안에 (문제의) 답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 성범죄인 동시에 암호화폐를 이용한 범죄 성격상 한국에서 수사를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며 "(동종 범죄를) 수사한 경험이 있고, 수사 의지가 있는 곳에서 수사를 하면 된다. 범죄 처벌과 예방, 억제효과에 있어서도 손씨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편이 더 맞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디지털 성범죄 특성 맞는 양형기준 정립해야" 요구 봇물
(사진=이은지 기자)
시민사회와 여성단체들은 즉각 입장문을 통해 사법부의 이 같은 판결이 시민들의 법 감정과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양형기준'을 정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ReSET)'과 '추적단 불꽃'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적정 양형 기준'을 새로 정립하기 위해 한 달 간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마감일인 이날 오후 6시 기준 5천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이들은 디지털 성범죄 각 유형에 대해 국민들이 생각하는 적정 형량 범위, 구체적 양형과정에서 고려 또는 배제해야 할 양형인자 등에 대한 의견을 모아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전달할 계획이다.
앞서 탁틴내일·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은 지난 2월 대법원 양형위에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에 관한 양형 의견서'를 제출했다. 해당 단체들은 의견서에서 △감경 사유 인정의 문제 △초범·형사처벌 전력 없음·진지한 반성·범행 인정·자백·합의·가해자의 연령, 직업 등의 문제 △제작 과정에 대한 피해자 동의 관련 문제 등을 언급했다.
이들은 "법원의 가중요소 판단이 일관되지 못하다. 재판부의 가치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진다"며 "재판부의 개별 판단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에 대한 재판부의 이해 정도에 따라 적용 여부가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재판부가 양형기준을 제대로 적용해 성착취물이 재생산돼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이것이 재판부의 사회적 정의"라며 "△부양가족 유무 △초범 등 범죄 전력 여부 △생계나 직업에 대한 남성중심적 관점을 적용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국제기준과 현행법의 제정 목적에 맞도록 양형기준을 새로이 적용하는 게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무엇보다도 "관용과 용서가 재범을 방지할 것이라는 그동안의 안이한 태도를 버리고, 아동·청소년 이용 성착취물의 피해와 수익 창출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사람의 인격권을 지켜주고 더 큰 범죄를 막는 예방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탁틴내일 이현숙 대표는 이날 CBS노컷뉴스에 "사법부가 손씨의 죄의 무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국민들의 분노, 법 감정 등의 문법을 사법부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디지털 성착취가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선언하고 쇄신하는 (법원의) 태도를 보여주기엔 미흡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 형을 높게 선고한다고 해도, 무기징역 등 강력한 처벌을 할지 모르겠다.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됐어도 소급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며 "양형 감형 요건들을 많이 없애야 한다. 수감돼 있는 성범죄자들은 반성문을 매일 쓰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피해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승희 대표는 "손씨가 제대로 처벌을 받을 때 앞으로 대한민국에 이 같은 사건들이 제대로 처분될 것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며 "1년 6개월 형을 받고 마감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중한 처분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전보다는 집행유예 선고 비율이 낮아지고 징역형 비율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지만, 사건별로 들쑥날쑥하다"며 "어떤 판사가 나오느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제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상향평준화된 양형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