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강제징용 소송 각하 판결 규탄 기자회견'에서 강제동원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손 피켓을 들고 있다. 이한형 기자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 각하 판결에 따른 파장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해당 판사를 탄핵하라는 국민청원에는 1주일 만에 30여만 명이 동의했다.
판결 내용이야 어떻든 법리 공방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비록 사법부라 하더라도 판단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민주 시민의 불가침 권리다.
물론 대법원 판결과 상반된 결정으로 인해 법적 안정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은 나온다. 하지만 이는 강제징용 문제가 그만큼 복잡다단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난해한 숙제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법치·민주주의의 건강함을 나타낸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과다한 의미 부여와 확대 재생산이다.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대법원 판결이 '뒤집혔다'는 게 기정사실화됐다. 그리 하여 강제징용, 더 나아가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 관한 한 우리 사법부 권위는 일시에 추락했다.
사법부의 혼란, 혹은 무능은 한일관계에 대한 아전인수식 해법으로 이어졌다. 법원 판결 취지를 존중해 대일 외교도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이 잇달았다.
이 과정에서 이번 판결이 1심 결과일 뿐이고 상급심에서 또 뒤집힐 수 있으며, 다른 비슷한 재판(서울중앙지법에만 20여 건) 결과가 남아있다는 것에 대한 고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유족 임철호(왼쪽) 씨와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가 공판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날 열린 선고 공판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다. 연합뉴스
어찌 됐든 1심판결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면서 논란은 점차 잦아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최근 1주일새 냄비 끓듯 한 여론은 한일관계의 구조적 핸디캡을 여실히 드러냈다.
많은 측면에서 대일 외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국민 여론을 의식한다는 차원에서 더욱 그렇다.
한국은 일본에 쉽사리 양보할 수 없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그렇다고 과거사에 발목 잡혀있을 수만도 없는 '미래지향적' 존재여야 한다.
일본이 여전히 적반하장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한국의 국력이 아직 약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모순적 난맥상 탓도 크다.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는 잠잠하다 이를 '뒤집은' 1심판결에는 호들갑 떠는 이율배반, 이게 어쩌면 일본 내 혐한 세력의 믿는 구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