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올림픽에 나선 권순우가 25일 도쿄 아리아케 테니스 파크에서 열린 미국 프랜시스 티아포와 남자 단식 1회전 경기를 치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이번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을 이끄는 종목은 단연 양궁입니다. 세계 최강으로 군림해온 양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사상 첫 전 종목 석권의 쾌거를 이룬 데 이어 5년 뒤 도쿄에서도 거침없는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처음 도입된 혼성 단체전에서 김제덕(경북일고)과 초대 챔피언에 오른 안산(광주여대)이 여자 단체전에서도 금빛 과녁을 명중시키며 2관왕에 올랐습니다. 여자 단체전 9연패의 신화.
유도에서도 첫 메달이 나왔습니다. 남자 66kg급 안바울(남양주시청)이 세계 랭킹 1위 이탈리아의 마누엘 롬바르도를 한판으로 눕히며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전날 태권도 남자 58kg급 장준(한체대), 펜싱 남자 사브르 김정환(국민체육진흥공단)까지 이번 대회 세 번째 동메달입니다.
하지만 메달이 요원한 종목도 많습니다. 통산 25번째 금메달로 쇼트트랙을 제치고 역대 최다 종목이 된 양궁도 있지만 32회째를 맞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단 한 개의 메달도 나오지 않은 '음지' 종목도 있습니다. 올림픽은 평소 프로 스포츠에 밀렸던 아마추어 종목들이 4년마다 비로소 전 국민들의 주목을 받는 기회. 그러나 그마저도 비껴자는 종목들이 적잖습니다. 메달이 어려운 종목이라 4년 만에 한번 오는 올림픽에서도 외면을 받는 겁니다.
그런 종목 중의 하나가 테니스일 겁니다. 테니스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지만 국내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예전 이형택(은퇴)이 메이저 대회 US오픈 16강에 오르고, 2018년 정현(제네시스 후원)이 호주오픈 4강에 진출하면서 한때 붐이 일기도 했지만 이후 주목할 만한 성적이 나지 않으면서 곧 시들해졌습니다. 2019년 3월 남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 데이비스컵 이탈리아와 원정에 나선 국가대표팀을 동행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코로나19로 무관중 결정이 나자 정윤성(의정부시청)은 "평소 국내 대회도 관중이 없어 익숙하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 테니스 인기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일 겁니다.
올림픽 효자 종목 양궁, 유도가 메달을 따내는 동안 한국 테니스도 도쿄올림픽을 조용히 치렀습니다. 남자 단식 간판 권순우(24·당진시청)입니다. 이날 권순우는 도쿄의 아리아케 테니스파크에서 열린 남자 단식 1회전에서 프랜시스 티아포(미국)를 상대했습니다.
남자 단식 세계 랭킹 71위 권순우와 53위 티아포의 대결이라 나름 기대를 해볼 만했습니다. 더군다나 권순우는 올해 최고의 상반기를 보낸 만큼 상승세에 있었습니다. 권순우는 올해 프랑스오픈에서 이형택, 정현 이후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단식 3회전까지 진출했고, 바이킹 인터내셔널 대회에서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개인 첫 4강까지 올랐습니다.
도쿄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 1회전을 치르고 있는 권순우. 도쿄=노컷뉴스하지만 결과는 세트 스코어 0 대 2(3-6 2-6) 패배. 권순우도 선전했지만 흑인 특유의 파워를 앞세운 티아포에 막혀 1시간 9분 만에 2회전 진출이 무산됐습니다. 이날 권순우는 서브 에이스에서 11 대 12로 대등했지만 상대 공격에 의한 실책(forced error)에서 24 대 12, 두 배나 많았습니다. 그만큼 티아포의 강력한 스트로크에 고전했습니다. 1세트 게임 스코어 1 대 2에서 권순우는 자신의 서비스 게임 때 듀스 접전 끝에 브레이크를 당한 게 아쉬웠고, 2세트 초반 두 번 연속 역시 브레이크를 내주며 흐름을 뺏겼습니다.
아쉽게 마무리된 권순우의 생애 첫 올림픽이자 한국 선수로는 13년 만의 올림픽이었습니다. 한국 테니스는 2008년 베이징 대회 이형택 이후 처음으로 권순우가 올림픽에 나섰습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정현도 기회가 있었지만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권순우는 1988년 서울올림픽 김봉수, 김일순의 3회전(16강) 역대 한국 선수 최고 기록을 넘어 내심 메달까지 노렸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경기 후 권순우는 "처음 올림픽에 출전하는 터라 긴장도 부담도 많았다"면서 "내 컨디션이 안 좋았다기보다 상대가 잘 쳤다고 칭찬해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어 "내 경기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상대 공이 굉장히 좋아서 압박을 받아 경기를 지켜려다 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서도 "서브, 스트로크 다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올림픽 출전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고 자신의 첫 올림픽을 돌아봤습니다.
권순우와는 일 대 일로 문답이 진행됐습니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 인터뷰에 나선 기자가 저 1명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메달이 결정되는 경기가 아닌 데다 이날 양궁과 유도, 펜싱, 태권도 등 다른 효자 종목들의 메달 가능성이 높았기에 한국 취재진이 오기 어려웠던 겁니다. 이날 권순우의 경기는 한국 취재진 중에는 저와 타사 사진 기자 한 분까지 2명만 현장에서 지켜봤습니다.
(사실 저 역시 당초는 테니스를 취재하고 유도장 혹은 펜싱 경기장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경기들이 늦게 끝나면서 권순우 경기도 시작이 늦어졌고 그 사이 유도와 펜싱 토너먼트에서 아쉽게 금메달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눌러 앉게 된 겁니다. 유도와 펜싱은 베이징부터 런던, 리우까지 하계올림픽 출장에서 많이 취재를 했던 만큼 처음 온 테니스 현장에서 우리 선수의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일본인 어머니와 아이티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가 25일 도쿄올림픽 1회전을 마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모습. 도쿄=노컷뉴스앞선 경기에서 진행된 일본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2위)의 인터뷰 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일본 기자는 물론 외신 기자들까지 수십 명의 취재진이 몰렸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세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30명 이상의 취재진이 오사카와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물론 오사카는 세계 여자 테니스 최고 스타입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여성 스포츠 선수 연간 수입 순위에서 2년 연속 1위에 올랐는데 최근 1년 동안 6000만 달러(약 690억 원)를 벌었습니다. 여기에 우울증에 따른 인터뷰 거부와 수영복 화보 논란으로 뉴스의 중심에 있던 터라 취재진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저 역시 오사카가 어떤 말을 하나 수많은 취재진 속에 슥 끼어들었던 겁니다.)
오사카를 단순히 권순우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일본 테니스의 현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일본은 오사카 외에도 남자 단식 니시코리 게이(69위)라는 슈퍼 스타가 있습니다. 32살의 니시코리는 전성기가 지났지만 2014년 US오픈에서 아시아 국적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 결승까지 오른 전설입니다. 2015년 단식 세계 4위까지 오른 니시코리는 2016년 리우올림픽 단식 동메달까지 따냈습니다. (권순우가 지난 22일 같이 훈련한 니시코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며 '나의 아이돌'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최근에는 니시오카 요시히토(55위)도 최근 투어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26살의 니시오카는 7년 전인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단식 금메달리스트입니다.) 일본은 남자 단식 세계 200위권에 6명이 포진해 있습니다. 우리는 권순우와 정현(184위) 2명뿐입니다. 여자 단식도 일본은 100위권에 3명, 200위권까지는 6명이 있지만 우리는 한 명도 없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테니스 메이저 대회 단식 4강에 오른 정현의 2018년 호주오픈 경기 모습. 대한테니스협회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테니스는 2018년 정현이 호주오픈에서 한국인 최초의 단식 4강 신화를 이루면서 부흥기가 오는 듯했습니다. 특히 '무결점 사나이'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와 16강전에서 전 세계 1위(현재는 1위)를 꺾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비록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4강전에서 발바닥 부상으로 기권했지만 한국 테니스도 니시코리, 오사카와 같은 세계적 스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세계 랭킹도 역대 한국 선수 최고인 18위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정현은 이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좀처럼 컨디션과 경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권순우가 분전하면서 세계 랭킹 69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만 정현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까닭에 붐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권순우는 아쉽게 첫 올림픽을 마쳤지만 "US오픈이 있는 미국 시즌과 유럽 투어 시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권순우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까지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 한국 테니스의 부흥을 이끌기를 바랍니다. 정현도 어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유망주들도 계속해서 나와 다음 올림픽 때는 더 많은 한국 취재진과 외신 기자들이 우리 선수들을 인터뷰했으면 했으면 좋겠습니다.
도쿄올림픽 테니스 파크 메인 경기장인 센터 코트에서 1회전을 펼치는 남자 단식 세계 4위 스테파노스 치치파스(아래)의 모습. 한국 선수들도 이런 센터 코트에서 경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쿄=노컷뉴스
p.s-물론 테니스만 올림픽에서 소외받는 종목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테니스보다 적은 관심을 받는 종목이 더 많을 겁니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종목을 취재해야 하는 여건상 메달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종목을 우선해야 하는 상황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25일에도 사이클 여자 개인도로에 출전한 나아름(삼양사)이 귀중한 역주를 펼쳤습니다. 38위로 메달이나 상위권에 오르진 못했지만 67명 중 19명이나 완주하지 못한 137km를 끝까지 달렸습니다. 런던 대회 때 한국 선수 사이클 개인도로 역대 최고인 13위를 기록한 나아름은 세 번째 올림픽 무대를 아름답게 마무리했습니다.
이밖에도 요트, 조정, 카누, 근대5종, 카라테, 럭비, 산악 등 우리 선수들이 도쿄올림픽에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나섰습니다. 일일이 현장을 찾아 취재하지 못하지만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과 똑같이 현장에 있는 마음으로 뜨거운 열정과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