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단독 면담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교황청 제공"초청장을 보내주면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평화를 위해 나는 기꺼이 가겠다. 여러분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형제이지 않느냐, 기꺼이 가겠다"
지난달 29일 바티칸을 방문한 자리에서 방북을 요청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이 답변한 말이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교황님께서 기회가 돼 북한을 방문해주신다면 한반도 평화의 모멘텀이 될 것"이라며 "한국인들이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다음날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교황이 초청을 받으면 방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반가운 소식"이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방북을 요청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지난 2018년 9월 열린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교황 방북 초청을 제안했고, 김 위원장은 "교황이 오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고 응답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10월 교황청을 방문해 방북을 요청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초청장이 오면 갈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3년이 흐른 지금까지 초청장은 오지 않았다.
'교황방북'은 '종전선언'과 함께 문 대통령이 내년 5월 임기 종료 전 달성을 목표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 초석' 마련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보여진다. 지난 9월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거듭 천명한 한반도 종전 선언은 미국과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이견이 표출되는 등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난달 26일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종전선언과 관련한 한·미 간 협의가 "매우 생산적이고 건설적"이라면서도 "정확한 순서나 시점, 조건에 대해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이 현실화하려면 크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왼쪽부터 김정은 위원장과 프란치스코 교황. 연합뉴스·교황청 제공첫째는 교황이 언급한 북한의 '초청장'으로 다름 아닌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이다. 과거 북한 정권이 교황 방북을 시도했다는 증언은 있다. 국민의힘 국회의원인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자신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의 첫 단락을 '교황을 평양에 초청하라'라는 일화로 시작했다.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지난 1991년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붕괴 당시 김일성 주석이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황 방북이라는 수단을 추진했다. 당시 자신도 교황 방북 추진을 위한 상무조(TF)의 일원이었으나 사실상 모든 권력을 넘겨받은 지도자 김정일의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는 증언이다. 김정일은 교황 방문을 계기로 북한 내 종교가 급속도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해 아버지 김일성의 뜻을 거슬렀다고 태영호 의원은 밝혔다. 30년이 흐른 지금은 두 사람의 손자이자 아들인 김정은 위원장에게 교황의 방북 여부가 달려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우 3년 전에 이어 이번에도 똑같이 "초청장이 오면 갈 수 있다"고 밝힌 만큼 최종 결단은 김 위원장에게 있는 셈이다.
북한은 아직까지 별다른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교황 방북에 흥미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고민 중인지 알 길이 없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종교 활동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북한 정권이 전 세계 영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교황을 자신들의 땅으로 초청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주민들을 단속한다고 해도 혹시라도 교황 방문이 몰고 올 내부적 파장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정상국가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교황의 방북만큼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는 없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싱가포르·베트남까지 날아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은 경험이 있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교황 방북은 그 때보다 더 매력적인 기회로 느껴질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태운 전용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고 자신이 교황을 맞아 포옹하는 모습 등이 전 세계 외신을 통해 지구촌 곳곳으로 전해진다는 상상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미국의 대북 압박 정책과 코로나19 사태, 거듭된 자연재해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바이든 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다. 더 나아가 체제 보장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수교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교황 방북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일 뿐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실속까지 챙길 알찬 기회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4년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협상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바티칸에서 양국 대표 간 만남을 주선해 돌파구를 제공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 오바마 대통령을 보좌한 부통령은 다름 아닌 바이든 현 대통령이다. 물론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도 전 국민의 85%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에서 '종교는 아편'이라는 기조 속에 종교를 통제하고 있는 북한과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초청장'에 이어 교황 방북의 두 번째 조건은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건강 문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생으로 다음 달이면 만 85세가 된다. 지난 7월 '장 결장 협착증'으로 장을 33cm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 등 건강 이상설이 불거지기도 했으나 그 외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령인 만큼 추위가 만만찮은 북위 38도선 위쪽에 위치한 북한을 한겨울에 방문할 가능성은 작다. 바티칸 교황청도 겨울철에는 관례적으로 교황의 외부활동이나 행사를 잡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2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프레스센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 및 회담 결과와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박경미 청와대 대변인 역시 지난 2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교황의 연내 방북 가능성에 대해 "교황님이 아르헨티나, 따뜻한 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움직이기 어렵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 2월로 예정된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교황의 방북 가능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기에 대해서는 예단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초청장'이 당장 전해진다고 가정해도 교황의 방북 시기는 빨라야 내년 봄이나 가능하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내년 5월 10일 정권 퇴임 이전에 현실화하기를 바라겠으나 그보다 앞선 3월 9일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만약 대선 결과 정권이 교체돼 보수정권이 들어설 경우 교황의 방북을 강하게 추진할지는 의문이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영구적인 평화를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보수·진보, 여·야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현실적인 차이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황의 라틴어 표현인 '폰티펙스'(Pontifex)는 '다리를 놓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내 소형차를 의전차로 고집할 정도로 평소 거침없고 소탈한 성격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해 남북을 잇는 평화의 다리를 놓아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