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 김지은 전 수행비서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손석희 전 JTBC 총괄사장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신간 '장면들'에서 당시의 소회를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뉴스룸'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미투 문제를 피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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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서지현 검사 인터뷰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의 진원지가 됐던 JTBC 뉴스룸.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손석희 전 JTBC 총괄사장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신간 '장면들'(창비)에서 당시의 소회를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장면 #3] 주차장의 보도턱에 앉아 김지은이라는 이름을 듣다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대형참사에 대한 어젠다 지키기는 차라리 단순한 것일 수 있었다. 거기엔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미투는 복잡했다. 젠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용기만 가지고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때로는 도가 지나친 공격들에 모두 대응하기도 어려웠다.
-198쪽[장면 #4] 그에게 물었다. "거부하지는 않았느냐"고
서지현 검사 인터뷰 이후 한달 여쯤 지나 생방송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 김지은 전 수행비서의 인터뷰. 상대가 대선주자급인 현직 여권의 광역자치단체장이라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은 뻔했고, 보도 여부를 놓고 고민은 깊어갔다.
무엇보다도 인터뷰에 대한 부담이 내게는 너무 컸다. 첨예한 문제에 대한 인터뷰로 때로는 모든 비난을 혼자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이번이 그랬다.
"부르시지요. 안 그러면 가해자가 도지사이고, 그것도 여권의 대선주자급이어서 피해갔다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피해자가 우리를 택했으니 우리가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200, 201쪽생방송 인터뷰를 결정하고나서 뉴스룸을 가득 채우던 폭풍전야같던 긴장감 또한 생생하게 서술됐다. 손 전 사장은 인터뷰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잠시 후 앵커석의 밝은 빛 속으로 그가 들어왔다. 숨어 있던 그가 세상으로 나오던 순간이었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은 그의 하얗게 말라버린, 한두군데가 터진 입술이었다.
-202쪽그동안 이어진 미투 보도로 인한 엄청난 파장과 그로 인한 중압감과 피로감에도 이를 보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절체절명의 것들"이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 이런 인터뷰는 더 이상 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라고 감정이 무쇠일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조금은 지쳐 있었고, 그때 스튜디오에 나타난 김지은은 나보다 더 지쳐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은 그 어떤 허술함도 허락되지 않는, 이를테면 절체절명의 것들이었다고나 할까. 스튜디오 전체에 흐르던 터질 듯한 긴장감은 그래서 그깟 '지쳤다'란 개인적 술회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202쪽18분 동안 이어진 당시 인터뷰에 대해 그는 "물리적으로는 길지 않았지만, 심적으로는 참으로 긴 인터뷰였다"고 술회했다.
[장면 #5] 나에게 물어왔다. "자신있느냐"고그는 당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김지은 인터뷰와 관련한 뒷얘기도 전했다.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1심 재판이 한창 막바지로 가고 있던 중에 안 전 지사 쪽에서 "김지은 건을 아직도 자신하느냐"고 물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러니까 '이 사건은 무죄라고 자신한다. 그러니 이 건을 인터뷰로 다룬 당신은 아직도 그 내용을 믿고 있느냐'는 뜻인 것 같았다"고 했다. 열흘 뒤 1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나고 그는 그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장면 #6] 세상의 변화는 조화로움 속에서만 오지 않는다
반년 뒤 2심에서 '유죄'로 뒤집혀 안 전 지사는 법정구속되고 2019년 9월 대법원에서 3년 6개월의 형을 확정받았다.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된 바 없다"던 1심의 결론은 2심에서 "순종해야만 하고, 내부 사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지방 별정직 공무원이자 비서라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로 바뀌었다.
그는 "피해자는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얼굴과 이름을 드러낸 채 방송에 출연하는 극단적 방법을 택했고, 성적 모멸감과 함께 극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근거 없는 내용이 유포돼 추가 피해도 입었다"는 판결문을 인용하며 "재판부의 눈에도 그의 방송 출연은 '극단적 방법'으로 보였던 모양"이라고 했다.
이 판결은 분명 진보한 것이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의 승리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세상의 변화는 조화로움 속에서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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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는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농단' 사건의 단초가 된 '태블릿PC' 사건과 200일 넘게 현장을 지키며 보도한 '세월호 참사'보다도 더 힘들었던 '미투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도 미투 보도에 적극적이었던 '뉴스룸'에 대한 일부의 비난은 계속된다.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어젠다 키핑은 그 의도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라 해도 현세의 갈등에 의해 얼마든지 폄하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206쪽현재 일본에서 순회특파원으로 활동 중인 손 전 사장은 CBS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인터뷰어도 사람이므로 미투 인터뷰는 상당한 감정노동일 수밖에 없었다"며 "김지은 씨는 거의 마지막에 우리를 찾아왔고, 나도 좀 지쳐있었으나 지속적으로 이어진 미투 관련 인터뷰에서 결국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케이스였다고 본다"고 밝혔다.
서지현 검사를 인터뷰할 때, 대한민국에 '미투'의 바람이 불어오리라고 예상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예상은 했으나 그 강도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그는 "젠더 문제는 그만큼 의견도 갈리고, 대립도 첨예할 수 있다"면서도 "그런 부조화 속에서도 진일보할 수 있다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손석희 전 JTBC 총괄사장의 신간 '장면들', 창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