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역투한 선동열 자료사진. 연합뉴스한국프로야구 40년 역사의 산증인 김응용(81)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김성근(80)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고문, 김인식(75) 전 국가대표 감독은 선동열(59) 전 국가대표 감독과 이승엽(46) KBO 홍보대사를 '역대 최고 투수와 타자'로 꼽았다.
많은 야구 관계자들도 같은 의견을 냈다.
선동열 전 감독은 "고(故) 최동원 선배도 계시는데 정말 영광"이라고 감사 인사를 했고, 이승엽 홍보대사 또한 "양준혁 선배, 이종범 선배가 더 대단하셨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감독님들께 좋은 평가를 받아 기쁘다"고 했다.
◇ 선동열, 불멸의 0점대 평균자책점…아쉬운 MLB 불발
선동열 전 감독과 이승엽 홍보대사는 거듭 몸을 낮췄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은 눈이 부실 정도다.
둘의 전성기 시절을 지켜본 감독들은 '기록되지 않은 가치'에도 가점을 줬다.
선동열 전 감독은 한국프로야구에서 11시즌 동안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의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다.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도 3차례나 뽑혔다.
특히 1986년(0.99), 1987년(0.89), 1993년(0.78) 세 차례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올리며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전성기가 지난 1996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한 선동열 전 감독은 4시즌 동안 162경기에 등판해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으로 활약하며 '나고야의 태양'으로 불렸다.
선동열 전 감독은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현재의 시선으로 인정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기록만 보면 나 자신도 '대견하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성적이 좋긴 했다"고 웃었다.
투수 선동열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며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감독이었던 김응용 전 회장은 "미국 야구 관계자들을 만나면 '왜 선동열을 메이저리그(MLB)에 보내지 않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선동열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도 성공할 투수였다"고 평가했다.
선동열 전 감독은 "나도 어릴 때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꿨다. 그러나 그때는 사회적으로도, 구단 상황도, 선수가 국외리그에서 뛸 상황이 아니었다"며 "일본에서 뛸 기회를 얻은 건 다행인데, 아주 가끔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면'이라는 상상을 한다"고 털어놨다.
꿈꾸던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지는 못했지만, 선동열 전 감독은 자유계약선수(FA) 제도가 없었던 시절 '투쟁' 끝에 열화와 같은 팬 성원을 등에 업고 한국프로야구에서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하는 첫 사례를 만들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큰 무대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국외리그에서 뛸 수 없다면 은퇴하겠다'고 내 나름대로는 마지막 카드까지 던져가면서 구단을 설득했고, 해태 구단이 나를 일본으로 보내줬다"고 회상했다.
선동열 전 감독이 일본행을 위한 문을 열면서 이종범, 이상훈 등 후배들도 일본프로야구 무대에 설 수 있었다.
◇ 이승엽 "감독님들이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이승엽 홍보대사는 현역 시절 '국민타자'로 불렸다. KBO리그에서만 467홈런을 치고, 일본프로야구 시절을 포함해 한일통산 626홈런의 금자탑을 쌓았다.
통산 홈런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2003년 56개)도 보유하고 있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단기전'에서 더 빛을 발했다. 많은 팬이 '이승엽의 홈런에는 서사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김성근 감독 고문은 "통산 성적도 좋고, 결정적일 때 해결하는 능력도 있다"며 이승엽 홍보대사를 최고 타자로 꼽았다.
김인식 전 감독도 "타자는 역시 이승엽"이라며 "국제대회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칭찬했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나 때문에 마음고생 하신 감독님도 계시는데"라고 웃으며 "해피엔딩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운도 많이 따랐다"고 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당시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뛰던 이승엽 홍보대사는 6-9로 뒤진 9회 1사 1, 2루에서 LG의 특급 좌완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 3점 홈런을 터뜨렸다.
앞선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의 극심한 부진을 겪었던 이승엽이 동점포를 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삼성은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구단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했다. 당시 삼성 감독은 김응용 전 회장이었다.
이승엽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지독한 타격 부진에 시달리다가 일본과의 준결승전 2-2로 맞선 8회 결승 투런 아치를 그렸다.
이 밖에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이승엽은 결정적인 홈런을 쳤다.
김인식 전 감독은 "이승엽 정도의 타자는 부진해도 믿고 써야 한다. 이승엽이 홈런으로 그 이유를 대신 설명한 것"이라고 평했다.
이승엽은 "압박감은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프로야구 선수는 다른 직장인들보다 많은 연봉을 받고, 좋은 대우도 받는다. 그 정도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프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며 "나도 늘 성공한 건 아니다. 그래도 '프로라면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떠올렸다.
◇ "투구 후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던 시절도 있었죠."
2022년은 한국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맹수'였던 선동열 전 감독과 이승엽 홍보대사도 감회에 젖는다.
40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특히 트레이닝 기법 등 훈련 방법은 몰라보게 진화했다.
선동열 전 감독은 "내가 프로 생활을 시작한 1985년만 해도 투구 후에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삼성 등 미국에서 스프링캠프를 치른 팀들이 '아이싱'(얼음찜질)을 배웠고, 1980년대 후반부터 '투구 후에는 아이싱'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나도 최근 세이버메트릭스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깨달은 게 많다. '직감'에 의존하던 한국야구에 데이터가 중심이 됐다"며 "내가 지금 선수 생활을 했다면 조금 더 체계적으로 훈련하지 않았을까. 술도 좀 줄이고…. 선수 생활을 더 오래 했을 것 같긴 하다"고 유쾌하게 웃었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1990년대 중반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반복적인 기술 훈련에만 집중했다"며 "지금은 기술 훈련을 하기 전에 몸을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선수들이 잘 알고 있다. 또한, 많은 데이터가 있으니 습관적인 반복 훈련보다는 '투수에 따른 맞춤 훈련', 몸통 회전 등 세밀한 기술 훈련으로 효율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노력, 성실함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 정신력으로 야구하는 시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야구를 향한 열정,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어야 팀도 승리하고, 선수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레전드의 바람 "국민스포츠 위상 되찾길"
한국프로야구 40년 역사에 굵고 화려한 이력을 남긴 선동열 전 감독과 이승엽 홍보대사는 후배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시대를 기대한다.
따듯한 위로도, 따끔한 충고도 필요한 때다.
선동열 전 감독은 "많은 분이 '2021년은 한국 야구의 침체기'라고 말씀하신다. 반성할 부분은 반성하고, 2022년에는 좋은 소식만 들리길 기원한다"며 "국민스포츠의 위상을 되찾는 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현장에 있을 때는 팬들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밝히며 "구단과 선수들이 진지하게 '팬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한다. 팬이 없으면 프로구단도, 프로선수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조언했다.
'국보 투수'였던 선동열 전 감독은 '에이스 탄생'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선 전 감독은 "국제대회 경쟁력, KBO리그의 인기 등을 고려할 때 투수들의 경기력 향상이 절실하다. 지도자와 선수들이 깊이 고민해야 한다"며 "1988년생 양현종, 김광현 이후 '진짜 에이스'가 탄생하지 않는 건, 프로야구에 악재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선수들의 품위'를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매일 프로야구 5개 경기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시대다. 스타 선수들은 좋은 대우를 받는다. 그만큼 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며 "그만큼 우리 선수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경기장 안팎에서 '응원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가 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현역 시절 '팬서비스를 잘하는 선수'였다. 그를 가까이에서 본 모두가 '이승엽의 인성'에는 엄지를 든다.
그러나 '팬 사인'에 관한 인터뷰 한 마디가 주홍글씨처럼 남았다. 이승엽 홍보대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할 정도'로 사과했다.
그는 "내가 직접 한 말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잘못을 인정한다"며 "나도 실수를 하고 잘못을 했으니, 후배들에게 더 진심으로 조언할 수 있다. 좋은 대우를 받는 만큼, 잘못했을 때 비판의 수위도 높아진다"고 했다.
그는 "우리 한국야구가 5년, 10년 뒤에는 지금보다 더 사랑받는 국민스포츠가 되길 기원한다. 나를 포함한 야구인, 현재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며 '모범적이고 팬 친화적인 야구'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