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심화. 연합뉴스달러와 함께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던 일본 엔화의 가치 하락세가 가파르다. 장기간 이어져 온 완화적 통화정책기조가 글로벌 긴축 움직임과 엇갈리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의도적으로 엔화 가치 하락, 즉 엔저(円低)를 유도해 경기부양을 꾀했던 일본이지만 최근엔 고위 당국자들 사이에서도 현 상황을 "나쁜 엔저"라고 진단하는 등 균열이 감지된다. 엔저 현상에 따른 수출 이득보다 수입물가 상승으로 인한 경제 타격이 더 크다는 위기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달러 대비 일본 엔화 가치는 최근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21일 오전 일본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28엔을 웃돌며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130엔선을 넘보고 있다. 환율은 지난달 31일부터 14거래일 연속 무서운 상승세를 보였으며, 올해 초와 비교했을 땐 12% 이상 올랐다. 그만큼 엔화 가치는 하락한 것이다.
이런 이례적 엔저의 주요 원인으로는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가 꼽힌다. 지난 3월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으며, 오는 5월엔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 금리인상'과 양적긴축 조치 병행까지 예고한 상태다. 반면 일본의 '제로금리' 원칙은 고수되고 있다. 미국의 달러 풀기는 이제 중단됐는데, 일본의 돈 풀기는 계속되고 있으니 엔화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선 조만간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35엔을 넘어서며 엔저 현상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 연합뉴스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본 경제 주요 인사들 사이에선 우려 메시지가 나온다.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은 지난 18일 중의원 결산 행정 감시위원회에서 엔저 추이에 대해 "나쁜 엔저"라고 평가했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일은)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도 같은 자리에서 "급속한 엔저는 (일본 경제에) 마이너스"라며 "중소기업 등에서는 수입가격 상승을 극복할 수 없으면 수익이 감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구로다 총재는 대표적인 '엔저 플러스론자'라는 점에서 발언의 주목도가 높았다. 구로다 총재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2차 집권기 초반인 2013년 일은 총재로 취임해 공격적 양적완화 정책이 핵심인 '아베노믹스'를 사실상 이끌어 온 인사다. "윤전기를 돌려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내겠다"는 아베 전 총리의 발언으로 상징되는 아베노믹스는 시중에 돈을 풀어 의도적으로 엔저를 지향하고, 이를 통해 기업 수출 이익을 높여 성장을 꾀한다는 구상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런 구로다 총재의 입에서 엔저 우려 메시지가 나왔다는 건 더 이상 구상과 현실이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일본의 2021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 무역수지는 5조3749억 엔 적자를 기록했다. 2년 만의 적자 전환으로, 우리 돈으로는 50조 원을 넘어서는 규모다. 올해 3월 무역수지도 4124억 엔 적자로, 8개월 연속 적자 기록을 이어갔다. 21일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3월 소비자 물가지수도 수입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전년 동월에 비해 0.8% 상승했다. 2년 2개월 만의 최대 상승폭이다. 엔저와 맞물린 수출 호조에 힘입은 성장이라는 경제 프로세스에 이상 신호가 깜빡이고 있는 셈이다.
연합뉴스엔화 가치 급락세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는 무엇보다 기준금리 인상이 꼽히지만, 일은은 현재로선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은은 오히려 새로 발행된 10년물 국채를 21일부터 26일까지 0.25% 이율에 무제한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긴축 영향으로 일본의 장기금리 지표가 되는 10년물 국채 금리가 상한선으로 여겨지는 0.25%대까지 상승하자 추가 오름세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다. 엔저 상황과는 사실상 반대로 가는 일은의 무제한 양적 완화 조치에 미쓰비시 UFJ 모건 스탠리 증권의 이나루 카츠토시 시니어 채권 전략가는 "환율을 무시해도 금리 상승을 억제하는 자세를 선명하게 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은이 금리 인상보다는 '인상 방어'에 무게를 싣고 있는 건 금리가 올라갈 경우 1천조엔(약 9679조 원) 규모로 불어난 정부 채무 관련 이자 부담 가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일은으로선 금리가 오르면 여태껏 사들인 천문학적 규모의 국채 가격이 하락한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경제·산업 분야 담당인 김규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 정부의 부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240%를 넘어섰는데, 그래도 버티고 있는 것은 제로 금리로 인해 이자부담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며 "일은도 고평가 된 국채 가격 '버블'이 터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구로다 총재는 엔저 우려 발언과 함께 "일본 경제 전체에 대해서는 플러스라는 평가를 바꾼 것은 아니다"라며 현 통화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곱지 만은 않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은은 완화를 계속하는 자세이지만, 어디까지 좌시할 수 있을까"라고 물음표를 던지며 "무리를 거듭한 정책 운영의 모순이 불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엔화 가치 하락이 일본 기업 제품에 가격 경쟁력을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수출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일각에서 나오지만, 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수출 타격은 미미할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지난 11일 보고서에서 "과거 엔저 상황에서도 일본의 수출 물량이 의미 있게 확대되지 않았고, 최근 한·일 수출 경합도도 하락하고 있어 엔화 약세에 따른 수출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