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식에 참석한 북한 김정은.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에 이례적으로 군복을 입고 등장했다.
2012년 집권 이후 열린 12차례의 열병식에서 김 위원장이 군복을 입고 참석한 것은 이번 열병식이 처음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흰색 '원수복'을 입고 열병식 주석단에 올랐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12년에 최고 지도자에게 부여되는 군 계급, 즉 '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지만, 그동안 원수복을 입고 공식 행사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양복이나 코트 입던 김정은, 열병식에 군복입고 첫 참석
지난해 1월 8차 당 대회와 지난해 10월 국방발전전람회에서 원수복을 입은 김 위원장의 사진이 공개됐을 뿐이다.
항일 빨치산, 즉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열병식이 기본적으로 군 관련 행사이기 때문에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김 위원장은 그동안 열린 열병식에서 대부분 양복이나 코트를 입었다.
2018년 2월 8일 건군절 기념 열병식도 같은 군 관련 행사이지만 김 위원장은 이 때 군복이 아닌 검은 색 롱 코트를 입었다.
흰색 원수복 견장에는 '대원수' 계급장
열병식에 참석한 북한 김정은·리설주 부부. 연합뉴스 게다가 김 위원장이 이번 열병식에서 입은 원수복의 견장에는 목란이 큰 별을 전체적으로 둘러싼 문양의 '대원수' 계급장이 부착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김일성 주석도 노년인 1992년에야 대원수에 올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망 뒤에 대원수 계급이 부여된 바 있다.
사실 김 위원장이 대원수에 올랐다는 공식 보도는 없었지만 국정원은 지난 2020년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김 위원장의 군 지위가 대원수급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이번 열병식에 처음으로 군복, 즉 원수복을 입고 참석한 배경은 무엇일까?
김정은 핵사용 범주 확대, 주관적인 상황 규정 우려도 제기
김 위원장은 열병식 연설에서 북한의 핵사용 교리와 관련해 매우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 핵 무력의 기본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에까지 우리의 핵이 전쟁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의외의 자기의 둘째가는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설정한 핵 무력의 기본 사명은 전쟁 억제에 있지만, 상대방이 근본이익을 침탈하려든다면 핵 무력의 제 2의 사명, 즉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물론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 드는 상황", "이 땅에서 우리가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북한의 입장에 따라 좀 더 주관적인 내용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김 위원장이 핵 무력 사용의 범주를 보다 공세적으로 넓혔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北 핵사용 입장, 우크라이나 침공한 러시아 입장과 유사할 가능성도 있어
북한, 열병식에 등장한 '화성-17형'.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입장이 비슷한 사례일 수 있다고 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을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전쟁을 벌인 뒤, 여기에 반대하는 미국과 나토 회원국들에게 핵사용 가능성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의 연설은 핵 공격을 받을 경우 이에 자위적 수단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 전통적인 입장을 벗어나는 것"으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미국이나 NATO 회원국들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핵사용의 범주를 넓히면서 그 대상으로 미국이나 남한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김정은의 연설은 대선 과정에서 나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선제타격 주장, 최근 부쩍 강화되는 한미동맹 등을 강하게 의식하며, 군사 메시지를 대외에 표출한 것으로 분석된다.
90년 전 항일빨치산 투쟁 소환해 내부 단결 촉구
아울러 김 위원장이 핵사용 가능성을 공언한 것은 북한 내부를 향한 체제 단결의 목소리이기도 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90년 전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을 소환하는 이유는 지금 상황이 당시와 비슷하다는 절박한 인식에 따른 것"이라며, "미국 등 적대세력과의 투쟁을 내세워 체제 충성과 정치·군사적 단결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열병식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전반적으로 굳고 단호한 표정을 이어 갔다.
김 위원장이 지난 2020년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에서 인민들을 향해 눈물까지 흘려가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것과는 크게 비교됐다.
김 위원장은 이번 열병식에서 핵사용 범주 확대 등 군사 메시지를 대내외에 강하게 전달하며 결기를 높였는데, 여기에는 양복이나 인민복, 가죽코트 보다도 군복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단호한 표정의 김정은, 눈물 흘리며 감정 표출한 과거 열병식과 대조
2020년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의 기본 주제가 '인민대중제일주의'라면, 김 위원장이 군복을 입고 나타난 이번 열병식은 상대적으로 군을 앞세운 것(선군)으로 관측된다.
김 위원장은 특히 이번 열병식을 기해 10개월 전에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 비서에서 해임됐던 리병철을 복원시켰다.
한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박정천도 기존 직책인 상무위원 겸 당 비서에다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더해 열병식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기존 5명에서 6명으로 늘었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군 출신 엘리트 두 명을 임명함에 따라 생긴 일인데, 김 위원장이 그 만큼 군을 우대한 조치로 해석된다.
박정천은 핵무기 등 군사력의 지휘통제를 주로 담당하고, 리병철은 핵미사일 개발 등 군수산업을 주로 관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무기 총동원한 열병식, 수위 높은 연설, 군 인사 우대…선군정치?
김 위원장의 수위 높은 열병식 연설, 90년 전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을 소환해 처음으로 기념 열병식을 개최한 사실, 리병철 등을 복권시키며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에서 군 인사를 우대한 일 등을 놓고 일각에서는 새로운 선군정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김 위원장이 이번 열병식을 기점으로 군을 앞세우는 선군 정치로 갈 가능성이 있다"며, "핵 무력 완성시대의 새로운 선군정치"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