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국내 증시가 하락 반전하면서 30대 후반 A씨는 글로벌 가상화폐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내집 마련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단 월급에서 모은 2천만원을 1차 투자했다. A씨는 원금 보전과 추가 투자를 위해 해당 코인 발행사에 대한 재무 건전성, 미래 수익 담보 재투자 계획 등의 자료를 찾아봤지만 주식시장과 달리 이렇다 할 정보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가상화폐 발행사에 대한 공시 의무가 현재 국내에서 법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았고, 이를 관리감독할 금융당국 역시 관계 법령 미비로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주식과 달리 정보 자체가 많지 않았다. 백서라고 하는 건 대체적으로 영문과 전문용어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며 "결국 코인 발행 주체와 여러 업체들 간의 업무협약 관련 기사들이 많아 '한 방이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투자를 했다. 후회되지만 어쩌겠나. 결국 한탕을 노린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A씨의 손실율은 현재 60%를 넘어섰다.
연합뉴스한국산 가상화폐 루나와 스테이블 코인 테라USD(UST) 폭락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A씨는 루나에 직접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코인 투자자 대부분은 발행사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리스크 관리 자체를 할 수 없는 구조다. 주식시장의 경우, 상장사의 가장 기본적인 수익구조와 미래 가치, 재무제표 등이 공개되지만 코인시장은 그에 비해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인터넷 카페 '테라 루나 코인 피해자 모임'에서도 비슷한 토로는 이어졌다. 코인 발행기관에 대한 정보보다는 가격 급등락에 따른 환희와 좌절만이 있었다는 글이 대다수다. 한 회원은 "코인 가격이 오르면 하루에 한 달치 월급 정도는 우습게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돈에 대한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고 되돌아 봤다. 다른 회원은 "이율 20%라는 말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5000만원을 넣었다가 하루 아침에 4000만원이 날라갔다"며 "원망도 되지만 그래프도 제대로 볼 줄 모르면서 난파선에 올라탄 제가 바보"라고 후회했다.
국내 거래소들은 최근 코인 투자의 위험성을 안내하기 시작했지만, 코인 상장 심사 초반 루나의 사업구조 위험성을 간과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이번 루나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거래소마다 상장과 상장폐지 기준도 제각각이라 투자자들만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상화폐 발행기관이 거래소 상장 때 사업계획서의 일종인 백서를 제출하지만, 수익 실현 방안, 코인 구조, 위험 수준 관리 등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거래소는 상장 후에도 해당 코인에 대한 주기적 모니터링을 하지 않아 투자자들에게 제때 위험 신호도 주지 못했다.
루나·테라 사태, 원인과 대책 긴급세미나. 연합뉴스실제로 지난 24일 국민의힘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과 코인마켓 투자자보호 대책 긴급점검' 당정 간담회에서 금융감독원은 "(루나가) 가격변동성이 높아 매우 위험한 투자상품이고 투기적 수요도 있었지만 규율 공백상태였다"며 "발행자의 공시가 불충분하고 난해해서 발생하는 정보비대칭으로 투자자가 가상자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간담회에는 금감원에서 이찬우 수석부원장과 김용태 디지털금융혁신국장이 참석했다.
거래소별로 제각각인 코인 상장 기준도 이날 도마에 올랐다. 이날 간담회에는 거래소 대표들도 대거 참석했는데, 도현수 프로비트 대표는 "루나와 테라는 가상자산 중 굉장히 특수한 사례"라며 "가상자산은 누구도 가격의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로비트는 알고리즘 기반 테라·루나 심사 때 담보 보장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상장하지 않았다. 또다른 거래소인 코어닥스 역시 '스테이블 코인으로서의 가격안정성을 위해 법정화폐 준비금이 필요하나 충분한 지불준비금을 마련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며 유사수신 가능성에 방점을 찍어 테라·루나를 상장시키지 않았고 심사 기준표도 공개했다.
연합뉴스이와 대조적으로 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와 같은 거래소들은 상장 결정을 내렸다. 루나 폭락 사태 속에서도 상장폐지 전 거래지원 정지 시기가 제각각이어서 단기 고수익을 노린 투자자들이 추가로 뛰어드는 상황을 방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거래소별로 통일된 기준이 없는 데다가 금융당국 역시 관리감독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루나 폭락 사태가 가속화될 때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
태라폼랩스에서 테라·루나 초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전 직원 강형석씨는 지난 2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수익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전혀 안 보였다. (투자자들에게) 20% 이자를 항상 지급하는 게 솔직히 불가능했고, (가능하려면) 깔끔하게 프로그램으로 적혀 있어야 하는데 테라폼랩스에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담보의 가치가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보다 높아야 차익이 실현되는 구조였는데 (테라, 루나 두 개의 코인을) 바꿔주는 구조가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폭로했다.
담보가치가 없는 스테이블 코인 테라·루나에 대한 허구성이 개발 초기부터 제기됐지만, 관계 법령 입법 책임이 있는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루나 폭락 사태가 가시화된 지금에서야 관련 제도 정비에 나섰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을 서두르면서 추가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현행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시행령 손질을 검토해달라고 정부에 주문했다.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려면 적잖은 시일이 소요되는 만큼, 먼저 특금법 시행령으로 가상화폐 예탁금 보호나 시장질서 교란행위 통제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도 "가상자산 투자자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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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가상화폐 전체 거래소의 실제 이용자는 558만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30대가 174만명(31%), 20대 이하가 134만명(24%)으로 절반 이상이 2030세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상화폐가 국내에 등장한지도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상화폐의 고유 속성인 '고위험 고수익' 구조를 놓고 사회적으로 '투자냐 투기냐'는 논란이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 보호에 소홀하고 수익만 쫒은 일부 코인 거래소들의 책임도 크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를 동안 금융당국이 최소한의 안전판 마련도 방기하면서 소박한 투자가 투기로 변질되는 것 역시 방치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강성후 한국디지털자산사업자연합회(KDA) 회장은 30일 CBS노컷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궁극적으로 업비트와 빗썸 등 4대 거래소가 투자자 보호를 소홀히 했다"며 "상장 기준 가이드라인이 너무 낮았고, 상장했더라도 사후 모니터링을 강화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거래소들의 잘못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기본적인 상도의를 무시한 거래소들의 탐욕적 경영을 정치권과 정부가 감시했어야 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아 결국 국민 피해만 늘어났다"며 "투자유의종목 지정, 거래종료, 입출금 중단에 대해서도 거래소별 공통된 상장기준과 절차가 만들어져야 한다. 가상화폐도 하나의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사업계획서나 제무제표 공시를 통해 투자 결정을 할 수 있는 정보가 반드시 제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95% 개미의 희생 위에 5%만 대박나는 기존 가상자산 생태계는 과감히 바뀌어야 한다"며 "상당한 수준의 투자자 보호를 기반으로 (코인) 투자자금이 벤쳐나 스타트업계 등 실물경제로 투입돼 투자자와 실물경제가 '윈윈'하는 사업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