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 일산 아파트. 연합뉴스정부가 1기 신도시(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지역 민심을 들쑤신 재정비 계획 논란을 놓고 진화에 나섰지만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정쟁으로 번져가는 모양새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로 나섰던 국토교통부 원희룡 장관과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정면으로 부딪힌 가운데, 정작 정부가 눈에 띄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사태가 쉽게 진정되지 않을 전망이다.
金 "사실상 공약파기, 도에서 할 수 있는 일 하겠다" VS 元 "권한 없는데 무지·무책임한 발언"
원 장관은 지난 23일 진행한 취임 100일 기념 기자간담회를 줄곧 1기 신도시 재정비 계획을 해명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지난 16일 주택공급대책 발표 당시 '올해 하반기 연구용역을 거쳐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플랜을 2024년까지 수립하겠다'고 밝혔다가 해당 신도시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당시 1기 신도시 재정비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인수위 기간 동안 연말까지 '마스터플랜'부터 세운 후 특별법 제정이나 도시기본계획 등을 추진하겠다고 한풀 미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마스터플랜 수립 시점을 다시 2024년까지 늦춘 것이다. 통상 재건축 사업이 5년 이상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 계획대로 진행하더라도 실제 도시 재정비는 2030년 이후에야 진행될 전망이다.
정부가 규제를 완화해 재건축 속도전에 나설 것이라던 기대가 깨지자 시장에서도 반응이 왔다. 부동산R114가 정부 발표 직후인 지난 19일 1기 신도시 아파트 가격을 조사한 결과 1주일 전 보합이었던 집값이 0.02% 하락세로 바뀌었다.
주민들의 반발에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김동연 경기지사가 기름을 부었다. 김 지사는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1기 신도시 마스터플랜을 2024년에나 수립하겠다는 것은 사실상의 대선 공약 파기"라고 비판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윤창원 기자이어 정부와 별개로 경기도 차원에서 △1기 신도시 노후화 실태 파악 △문제 해결을 위한 TF 설치 △국회 협력을 통해 용적률 등 건축규제 완화와 핵심 기반시설 확충 지원을 위한 '1기 신도시 특별법' 추진 △도내 주택 노후화 전반에 대한 실태 파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상황이 '공약 파기' 국면까지 번지자 윤석열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나섰다. 윤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무회의 마무리발언에서 "정부가 주택 정책에 대해 발표했으나 국민께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뢰를 얻지 못한 점이 있다"며 "국가의 주요 정책을 발표할 때는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국민의 시각에서 판단해달라"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장관직을 걸고 지체되는 부분이 없도록 약속드리겠다"고 나선 원 장관은 김 지사를 상대로 거침없이 맹비난을 쏟아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윤창원 기자원 장관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정치적 발언으로 주민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해서는 안된다"며 "정치를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특히 원 장관은 도시정비기본계획 수립부터 준공처리까지 광역지자체장인 김 지사가 1기 신도지 재정비 사업에 개입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뒤집어말하면 마스터플랜 구축부터 실제 재건축을 마칠 때까지 경기도는 관여하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경기도 측은 어이없다는 입장이다. 도시정비법상 김 지사가 재정비 사업에 직접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없지만, 국토부가 더 속도를 내도록 돕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경기도의 한 관계자는 "입법 과정이나 국토부가 규제를 완화할 때 시군지역의 의견을 들을텐데 경기도가 도와서 그 절차를 압축해 제시하겠다는 것"이라며 "예컨대 주민들이 재건축을 하느냐, 리모델링을 하느냐 선택할 때 판단할 수 있도록 돕고 의견을 취합하도록 용역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SOC 등을 마련하려면 지방비가 필요하고, 도비를 매칭해야 할텐데 도에서는 뒷짐만 지고 있다가 '돈 내라'하면 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시군이 개별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부분을 경기도가 돕는 차원에서 정책을 세울 때 함께 고민하고 협력해야지, 권한이 없다고 뒤로 빠지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김 지사 역시 같은 날 SNS를 통해 "경기도의 권한이 제한적이라고 해서 도지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경기도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입장을 재확인했다.
결국 원 장관 해명에도 빠진 '타임테이블'…1기 신도시 주민 불만 쉽게 꺼지지 않을 듯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석열 정부 첫 주택공급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원 장관의 노력에도 사태가 쉽사리 진화되지 못하는 까닭은 애초 1기 신도시 재정비 계획 논란의 근본 원인이 김 지사가 아닌 따로 곳에 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정부가 발표한 계획이 시장의 기대와 불안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날 원 장관은 속도를 높이기 위한 3가지 대안도 제시했다. ①국토부 내 관련 TF 조직을 확대개편해서 5개 신도시 시장들과 협의하고, 더 나아가 실장급인 TF 조직을 차관급으로 격상해 힘을 싣고 ②마스터플랜을 세우기 위한 연구용역을 당장 다음 달(9월) 안에 발주해서 최대한 서두르고 ③각 신도시마다 마스터플래너를 지정해 지자체부터 주민대표, 단지별 주민들까지 의견을 수렴하고, 실태를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2024년 마스터플랜 수립'이라는 대전제는 그대로 둔 채 구체적인 타임테이블이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여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장 용적률 상향 조치, 특별법 추진 등 관련 절차에 즉각 돌입하라고 요구하는 주민들의 요구와는 온도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주민들의 불만이 커진 이유는 결국 계획이 늦춰졌다는 것 그 자체"라며 "게다가 16일 당시 보도자료에 관련 내용이 현황 분석까지 포함해 고작 4줄 정도만 들어있었는데, 주민들로서는 '정부에게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마스터플랜을 위해 여러 측면에서 신경을 쓰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서도 "구체적으로 계획이 어느 정도 더 당겨질 수 있을지, 공급계획을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고 그 결과 언제쯤 발표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