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왼쪽),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연합뉴스한중 수교 30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표현 중 하나로 '건설적 역할'을 들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 보낸 수교 30주년 축하서한에서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 측의 건설적 역할을 희망"한다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중국 역시 건설적 역할론에 긍정적이며 실제로 계기마다 공언해왔다. 하지만 건설적 역할은 당위적 느낌이 강한 표현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외교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한국은 대북압박, 중국은 평화안정…말은 같되 속뜻은 달라
한중관계에선 여기에다 각자 속뜻이 다르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현 시점에서 한국이 원하는 중국의 건설적 역할은 대북 압박이다. 말로는 북한이 대화에 나오도록 중국이 영향력을 발휘해달라는 것이지만 실상은 북한에 제재 뒷문을 열어놓지 말고 더 옥죄어 달라는 부탁이다.
반면 중국이 말하는 건설적 역할은 '한반도 평화 안정'에 방점이 찍혀있다. 중국은 그 방식이 제재‧압박이건 대화‧협상이건 기본적으로 한반도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자국 이익을 해친다고 본다. 중국의 입장은 한국 정권과 상관없이 대체로 일관적이다.
박진 외교부장관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한· 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예컨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중국의 '쌍중단‧쌍궤병행'과 비슷했다. 쌍중단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과 한미군사훈련의 동시중단을, 쌍궤병행은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체제 협상을 병행 추진하는 것이다. 건설적 역할에 대한 양측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중국은 2018년 북미관계가 급진전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자 또는 4자회담'이 언급되는 등 중국 배제 가능성이 엿보이자 또다시 건설적 역할을 강조하며 경계심을 나타냈다.
미중경쟁 격화되자 北 전략적 가치 커져…尹 대북구상과 마찰
따라서 강력한 대북 압박으로 전환한 윤석열 정부가 중국 측과 충돌하는 것은 이제 자명한 일이다. 더구나 정부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나 4자 반도체대화(칩4) 같은 중국 포위망에 거침없이 참여하며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으로선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국과 미국의 대북 압박 요구를 들어줘야할 이유가 더욱 없어졌다. 사실 중국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초기에만도 대북 제재에 적극 동참하는 듯했다. 미국의 서슬 푸른 위세와 냉랭했던 북중관계 등이 원인이었다.
당시 중국은 대북 선제공격까지 거론되며 전운이 감돌자 북한을 압박해서라도 다급히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그러나 이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의 봄'이 시작되자 미중 전략경쟁으로 다시 눈을 돌리고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류샤오밍 중국 정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 연합뉴스중국 정부의 류샤오밍 한반도사무특별대표는 지난 5월 방한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건설적 역할을 재확인하면서도 "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북한과 미국의 손에 있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 핵무장에 대한 '중국 책임론'에 맞서 '미국 책임론'으로 응수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적대시 정책 때문에 핵을 개발했다는 북한 논리를 두둔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에도 협조하지 않고 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제노‧이수석 연구원은 최근 '한중수교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보고서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국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낮춰야" 할 필요성을 거론했다. 이게 오히려 관계 진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건설적 역할' 동상이몽에도 매번 되풀이…과도한 기대로 中 몸값 높여
결국 이쯤 되면 정부의 일관되게 답답한 대응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한국 측 요구, 특히 보수정부의 대북 압박 요청을 들어줄리 만무함에도 메아리 없는 외침을 반복하는 것이다. 중국은 건설적 역할에 대한 의지와 별개로 능력 면에서도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중국의 대북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북중관계도 생각만큼 원만하지는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방증하는 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친중파로 알려진 의붓형을 암살하고 고모부를 처형한 사실이다. 북중 간에는 2018년 김 위원장의 첫 방중 전까지 7년여 동안이나 정상회담이 중단되기도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뿐만 아니라 북한이 코로나19 국면에서 스스로 문을 닫아건 것은 중국의 도움 없이도 최소한의 생존은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중국의 건설적 역할에 대한 오해와 동상이몽은 중국에 대한 인식을 출발부터 꼬이게 만들었다. 그로써 비롯된 중국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실망과 반감으로 이어져 한중관계 악화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美 트럼프에 걸었던 기대도 좌절…'한반도 문제는 스스로' 쓰라린 교훈
그럼에도 역대 우리 정부는 안이한 인식 하에 건설적 역할을 입버릇처럼 반복하며 객관적 인식 교정의 기회를 놓쳤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경제 뿐 아니라 안보 측면의 역할론까지 과대평가되며 필요 이상의 특별대우를 받았다. 우리로선 쓸데없이 을(乙)의 위치를 자처해온 셈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건설적 역할은 중국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탁하고 말고 할 게 없다"면서 "중국이 들어줄 리도 없는 얘기(대북 압박)를 계속 함으로써 중국 몸값만 높여줬다"고 지적했다.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연합뉴스
중국의 건설적 역할론이 남긴 더 큰 해악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의 자주성을 약화시킨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품었던 '한반도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도 하노이에서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국가 핵심 이익은 동맹국에조차 의탁할 수 없다는 뼈저린 경험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북핵 해결에서의 건설적 역할은 오히려 미국에 있다. 건설적 역할의 의지도 능력도 없는 중국을 상대로 헛힘을 쓰는 것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정녕 '담대하게' 한반도 문제를 풀 요량이라면 얼굴을 붉혀가면서라도 미국의 눈과 귀를 붙잡는 게 순서다.
미국도 안팎으로 복잡한 상황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지난한 과제이지만 대안이 없다. 설령 한반도 정세가 호전될 수는 없더라도 더 악화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6공 실세로서 북방정책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최근 토론회 발언은 그런 점에서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그는 중국의 힘이 커졌고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G2체제가 형성됐음을 미국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우리가 직시하고 미국 측에 솔직히 담판해야 한다고 본다.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 전략경쟁으로 인한 역내의 과도한 긴장을 어떻게든 낮추지 않으면 우리 국익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기에 미국과도 당당히 얘기를 해야 한다는 한 보수주의자의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