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청년도 노인도 불행한 '인구 디스토피아' ②놀이터엔 노인들만…"애 한 명도 안 태어난 마을도"[영상] ③"마을 하나씩 매년 사라지는 셈…20년 후가 두려워요" ④20여년 간 41개 학교 문닫은 신안…"공공인프라 길게 보고 심어야"[영상] ⑤지역 특색 살린 '살아보기'로 인구 유치…"가장 큰 걸림돌은 주거 문제" ⑥'과밀한' 경기도마저 인구위기 '빨간불'…"80대도 안아프면 일해야" ⑦가평 이사 간 목동엄마의 분투기 "주3일은 서울行" ⑧MZ세대 남녀 '동상이몽' 심화…멀어지는 결혼·출산 ⑨현실판 '82년생 김지영' 도처에…"이기적이란 말이 이기적" ⑩'비혼 1세대'가 바라본 저출생…"'삼중 노동' 여성들의 파업" ⑪"육아대디 되니 아내와 '동질감'…평일 회식도 눈치 안봐" (계속)
|
스마트이미지 제공
2000년대 초반 영국문화원이 세계 비(非)영어권 국가 102개국의 4만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로 '마더'(mother·엄마)가 뽑혔다. 패션(passion·열정), 스마일(smile·미소), 러브(love·사랑), 이터니티(eternity·영원) 등이 뒤를 이었지만, '파더'(father·아빠)는 순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이는 부모 중에서도 엄마가 자녀들에게 갖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탯줄로 연결된 아이를 열 달 간 뱃속에 품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게 사실이다.
18년이 흐른 지금, 자녀 양육을 무조건 엄마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적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기성세대에겐 여전히 모성(母性)을 절대화하고 아빠를 '보조적' 양육자로 간주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경제적 여건만 받쳐준다면 가급적 아이는 여성이 전담해 키우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다.
최근 양육에 배우자 못지않은 열의를 보이는 '육아 대디'들은 이 공고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 있다.
두 딸 은빈(6), 은우(4)와 함께한 김진환(36)씨. 김씨는 아빠들의 육아를 다방면으로 지원하는 '경기도 아빠하이!' 사업에 참여 중인 열혈 '육아 대디'다. 김진환씨 제공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김진환씨도 그 중 한 명이다. 86년생인 김씨는 딸만 둘인 30대 젊은 아빠다. 올해로 결혼 7년차에 접어든 그는 임신·출산을 비교적 빨리 경험했다. 사실 아이 욕심이 크게 있는 편은 아니었다. 현실주의자답게 '하나만 낳아서 제대로 키우자' 했지만, 3남매로 형제들과 부대끼며 자란 아내는 아이를 더 원했다. 그렇게 6살 은빈이, 4살 은우가 차례로 찾아왔다. 어릴 적 동물원 앞에 내려다 주곤 곧바로 일하러 가셨던 아버지와는 다른 아빠가 되고 싶었다.
김씨가 참여하고 있는
'경기도 아빠하이!'(아빠하이)는 코로나19 사태가 촉발된 2020년부터 시작됐다. 경기도 여성가족재단이 도(道)와 시·군의 육아종합지원센터와 협업해 진행하는 사업이다. 재단은 "양육의 주 책임자로서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된 아버지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고, 가족이 함께 나누는 양육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 건강하고 성평등한 가족문화가 도내에 확산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고 사업 취지를 설명했다.
아빠하이는 온라인 카페를 기반으로 매주 참여자들이 아이들과 일상 속에서 함께할 수 있는 양육 관련활동을 미션으로 영상으로 제공한다. 아빠들은 미션을 수행한 뒤 '인증' 게시물을 올려 다른 아빠들과 공유한다. 아이들은 이불과 베개로 '탑'을 쌓는 게임을 하면서 아빠에게 수면 습관을 배우고, '병뚜껑 컬링'을 하는가 하면 '재활용품 슛~골인' 놀이를 통해 분리수거를 익힌다. 미션은 아이들의 연령별(3~5세, 6~7세 등)로 분리 제공되는데,
아빠와의 스킨십을 늘리면서도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발달을 도울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다.
김진환씨는 지자체 육아종합지원센터 교육을 다니던 아내의 권유로 지난해 아빠하이 2기로 합류했다. 아빠하이 홍보단장도 맡았던 그는 활동 면면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도지사가 표창하는 '우수 아버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달 31일 용인 수지구 소재 직장 근처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저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아버님들이 많다. 그분들은 저에 비해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대외활동을 안하시니 티가 안 나는 것뿐"이라며 '좋은 아빠'란 호칭에 손사래를 쳤다.
"가끔은 '이런 게 미션이야?' 싶을 정도로 (쉬운 활동을) 하는데, 의외로 애들이 엄청 좋아해요. 제가 생각하지도 못한 놀이가 있거든요. 첫 아이가 이제 한글을 떼는데 맨 처음 알게 된 말이 '아빠하이'에요. 주말만 되면 '아빠, 아빠하이 하자'고 하는데 그만큼 재밌거든요. 명절이나 어린이날에는 그 절기에 맞는 놀이키트도 (재단에서) 보내주세요." 처음부터 아들보다 딸을 바랐다는 '딸 바보' 아빠지만, 이만큼 아이들과 친밀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전엔 딸들이 씻는 것과 자는 것 모두 아내의 손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엄마만 찾는 통에 아내 혼자선 외출이 불가했다. 아빠하이는 어느 정도 틈이 있었던 부녀 관계의 확실한 전환점이 되어줬다.
"올해는 심지어 와이프가 장모님, 처형과 2박 3일로 제주도 여행도 갔다 왔어요. 원래 엄마들끼리 주말에 하는 모임도 (아내가) 나갈 수 없었는데, 이젠 아이들이 아빠랑 집에 있는 걸로도 놀러가는 게 대체가 되는 거죠. 아내는 조금 더 외출이 자유로워지고, 저도 평일에 눈치 안 보고 회식하게 되고(웃음)… ." '경기도 아빠하이' 앞치마를 매고 있는 딸과 김치를 만들고 있는 김진환씨. 김씨 제공주말마다 '아이들과 뭘 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거리를 덜게 된 것도 소득이다.
전에는 아내로부터 늘 아이디어를 얻었다면, 지금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아이들과의 시간을 꾸려나가고 있다. 김씨는 기자를 만난 날에도 '꼭꼭 숨어라~보물찾기' 미션 준비를 위해 점심시간에 다이소를 들렀다고 했다. 야외에서 할 수 있는 놀이뿐 아니라 종이를 접어 물에 넣으면 꽃잎처럼 펼쳐지는 과학놀이 등 종류도 다양하다.
만족감이 제일 컸던 부분은
아이의 기질을 파악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다.
"아이가 왜 이렇게 예민한지, 왜 밥을 잘 안 먹는지 등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고 제가 훈육을 주로 하는지, 아님 방관하는 스타일인지 등 스스로 양육태도도 진단해보는 거에요. 그걸 토대로 아이 연령대·기질형태에 따라 소그룹 상담도 했는데, 고민들이 다 비슷비슷해요." 김씨는 "아빠들은 이런 수업을 같이 들어서 그런지 (고민 상담도) 더 리얼하게 나오더라. 엄마들은 본인 방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어서 조금 더 조심스럽다면, 아빠들은 부끄러움 없이 약점을 '민낯'처럼 시원시원하게 얘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집과 직장이 지척인 데엔 육아를 '함께' 하고 싶다는 김씨의 의지가 작용했다. 현재 대기업의 모빌리티 계열사에서 인사팀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당초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신혼집 살림을 차렸다. 저녁 6시에 칼같이 퇴근해 수지에서 서울까지 달려가도 집에 도착하면 7시 반이 됐다. 그는 "둘째까지 태어나고 나니 와이프가 너무 힘들어했다. 아내가 '밥상머리 교육'을 중요시 하다 보니 아이랑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게 (내게도) 제일 중요했다"고 밝혔다.
명실공히
'육아대디'가 되고 나서 어떤 변화를 가장 크게 느꼈냐는 질문에 김씨는 부부 사이가 돈독해졌다는 점을 첫손에 꼽았다. 배우자 입장에서의 역지사지가 저절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퇴근이 늦어질 때면 아내에게 '미안해. 그 대신 내가 내일 쉬니까 오전에 자유시간 가져'라는 말도 쉽게 건넬 수 있게 됐다.
"'동질감'이란 단어가 딱 맞는데,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거죠. 왜 힘든지, 이 상황에서 왜 짜증이 나는지…예전엔 나도 나름 퇴근 일찍 해서 온 건데 와이프는 '늦게 왔다'고 뭐라 하면 서운했거든요. 이젠 단순히 '그래, 애 보느라 힘들었어. 고생했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뭐가 힘들었는지 알아주니 아내 입장에서도 고마운 거고요. 남자들은 '우리 엄마한테 맡겨라', '사람 붙여줄게'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만 하는데 그럼 동질감이 안 생기죠. (마음을) 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점수를 딸 수 있어요." 당연히 육아휴직을 자원했을 것 같지만, 김씨는 "쓰지 못했다"고 했다. 환경이 도와주지 않았다. 전 직장은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직원에게 사직서를 같이 받는 분위기였다. 이에 더해 특수교사인 아내보다 급여가 더 많다 보니 휴직한 아내를 대신해 일을 계속하게 됐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막는 장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여실히 느꼈다.
"육아휴직은 법으로 규정된 '권리'인데 왜 사측이 인심 쓰듯이 '쓸 거야, 말 거야'라고 물으면서 복지처럼 취급하냐는 거죠." 지난달 31일 김진환씨가 용인시 수지구 소재 직장 근처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씨는 육아뿐 아니라 직장 내 성평등 등 젠더 이슈에도 관심이 많다. 이은지 기자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국내 육아휴직자는 작년 기준 11만 555명으로 이 중 26.3%가 남성이다. 전체 대비 비중이 10%에도 못 미쳤던 5년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늘었지만 아직도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2016년 기준 한국 남성의 육아휴직 참여율은 8.5%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18.0%)에 비해 현저히 낮다. 출생아 100명당 사용자로 따져보면, 1.9명으로 △스웨덴(314.1명) △노르웨이(96.1명) △독일(35.0명) 등 주요국과 격차가 큰 편이다.
이마저도 국내는
사용 여성(40.4%)과 남성(56.6%) 모두 300인 이상 규모 기업에 쏠려 있다.
클릭하거나 확대하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거나 확대하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거나 확대하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씨가 이러한 현실에 느낀 답답함은 인사관리자로서 사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회사는 그의 발의를 수용해 올 3분기부터 '육아휴직 3개월'을 의무화시켰다.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을 '최소 3개월'은 써야 사측에서도 대체근로자를 구할 정도의 기간(6개월)이 된다고 봤다.
임신·출산은 축하받아야 할 일인데, 많은 여성직원들의 첫마디가 "어떡하죠"라는 것도 안타까웠다. 임신 고지 시점부터 안정기인 16주까지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남성직원도
임신한 아내가 산부인과 검진을 받으러 갈 경우, 동행하란 의미에서 휴가를 제공한다. 특정 성별에만 주어지는 혜택으로 인식되기보다는, 남자들도 배우자가 임신·출산을 하는 과정 안에 당사자로 편입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그 자신도 예전엔 왜 여성 근로자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생리휴가를 유급으로 주는지를 고민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생리통이 심한 아내를 보며 이해의 폭을 넓힌 그는 '사내 성평등'에도 관심이 많다.
팀장급 이상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실시한 김씨는 '성희롱을 하지 맙시다'보다는 '성평등한 직장을 만듭시다'가 수용자들에게 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믿는다. 신입을 채용하는 면접관들에겐 성차별적 발언을 방지할 수 있는 일종의 가이드라인도 제시하고 있다.
딸들이 주역이 될 10년, 20년 후의 세상은 조금 더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지방에 계신 어머니가 아들의 육아를 못마땅해 하시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지만, 언젠가는 이해해주실 것으로 길게 내다보고 있다.
춘천시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국민씨는 보건복지부 등이 운영하는 '100인의 아빠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션을 완료한 뒤 두 딸과 함께. 이국민씨 제공 비수도권 지역에서도 많은 아빠들이 육아를 '내 일'로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춘천시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근무 중인 이국민(45)씨는 보건복지부·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100인의 아빠단'으로 5년째 활동하고 있다. 시청에 오기 전 소규모 업체 또는 사기업에서 일했던 그는 "당시만 해도 눈치도 눈치지만, (제도 자체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육아휴직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12살 아들을 맏이로 1남 2녀를 둔 이씨는 대학병원 간호사인 아내의 근무체제(3교대)로 인해 자연스럽게 전담 육아에 뛰어들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인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 부부 역시 맞벌이다 보니 아이 하나라도 아플라치면 가슴이 조마조마하지만,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근무제를 활용할 수 있게 돼 그래도 형편이 나아졌다. 이씨는
"아빠들의 육아를 장려할 수 있는 제도들의 적극적인 홍보, 법적인 사용 의무화 등에 적극 찬성한다"고 밝혔다.
태권도 관장인 이경태씨는 광주에서 7살짜리 아들, 4살 난 딸을 키우고 있다. '100인의 아빠단'인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광복절 기념 태극기 챌린지' 미션을 꼽았다. 이경태씨 제공광주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7살 난 아들, 4살짜리 딸을 돌보는 이경태(37)씨도 "육아는 힘듦도 있지만, 그보다 행복이 훨씬 더 크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제 직업이 다양한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다 보니, (아빠의) 관심 정도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더 느낄 수 있었다"며 "육아 관련서적을 보면서도
아빠의 역할이 아주 크다는 걸 느꼈다. 아이에게 좋은 추억과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이씨는 "시대가 많이 변해서 부모님도 가사 일과 육아를 많이 일러 주시고 응원해주신다"며 "자영업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근로시간을 줄일 수 있는 직종은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와 단축근무제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