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20년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씨가 북한군에 피살된 뒤 소각된 정황 등이 담긴 군 첩보가 5600건이나 삭제된 것으로 검찰 조사 결과 파악됐다. 국가정보원도 이 사건과 관련된 첩보 50여건을 삭제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이희동 부장검사)는 29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노은채 전 국정원장 비서실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해 고 이대준씨 관련 첩보 및 보고서를 삭제하게 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2020년 9월 이대준씨가 피살된 후 관련 첩보의 삭제 지시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내려진 것으로 파악했다. 서훈 전 실장의 '보안 유지 지시'를 받은 박지원 전 원장과 서욱 전 장관이 숨진 이씨와 관련된 첩보 등을 삭제하라고 다시 지시했다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당시 국방부와 예하 부대 등 군 당국이 군사통합정보처리체계(MIMMS) 등에서 삭제한 첩보는 모두 5600여건에 이른다. 검찰 관계자는 "중복을 포함해 5600건 정도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정보 삭제나 정리가 아니라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본다"고 밝혔다.
국정원도 첩보 및 보고서 50여건을 삭제한 것으로 조사됐다. 감사원은 지난 10월 국방부와 국정원이 각각 60건, 46건을 삭제했다는 감사 결과를 밝혔었는데, 검찰 수사에서 삭제된 보고서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황진환 기자검찰은 고 이대준씨가 자진 월북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결론내렸다. 검찰은 "이씨가 실족했는지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수사팀은 실족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라며 "바다에 빠질 때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 월북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씨가 발견 당시 입고 있던 '한자가 적힌 구명조끼'를 바다에서 부유하던 중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검찰은 이씨가 바다에 빠졌을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재현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바다가 방향조차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 만큼 어두웠고, 조류 때문에 원하는 방향으로 장시간 수영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며 "특히 이씨가 탔던 배와 이씨의 발견 장소가 27㎞나 떨어져 있는데 서울중앙지검에서 일산 호수공원까지의 거리다. 다른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이 거리를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또 "국정원도 당시 이씨가 월북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분석 결과를 갖고 있었다"라면서 "국방부 등 관계 기관 실무자 다수도 검찰 조사에서 자진 월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서면 조사는 요청하지도 진행하지도 않았다라면서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지원 전 원장과 노은채 전 국정원장 비서실장 두 사람은 이대준씨 피살 다음날인 2020년 9월23일 국정원 직원들에게 관련 첩보와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욱 전 국방장관도 국방부 직원 등에게 관련 첩보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가 적용됐다. 다만 검찰은 박 전 원장과 서 전 장관 등에게 첩보 삭제를 지시한 서훈 전 실장의 혐의는 이번에 기소하지 않고 추가 수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대준씨의 피살 사실을 은폐하고 자진 월북으로 단정지은 배경에 대해 "우리 국민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국민적 비난이 예상됐고, 정부 정책을 향한 여론이나 남북 관계에 악재로 작용할 것 역시 예상됐다"라며 "이를 회피하기 위해 '보안 유지'라는 미명 하에 피격 등에 관한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번 사안의 본질에 대해 묻자 '피살 은폐'가 아니라 '월북 몰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자진 월북자라고 규정되면 본인뿐 아니라 남겨진 가족에게도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을 남길 수 있다. 국가가 개인의 월북 결론을 내리려면 사법 절차에 준하는 충분한 조사와 신중한 판단, 명확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자진 월북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범죄 행위"라면서 "우리 사회에서 자진 월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에 여러 경위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간첩 등 죄명으로 처벌받은 분들이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재심 절차가 이뤄지고 있고 억울하게 처벌받은 분들이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