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경고파업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경찰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최근 정부·여당이 '야간집회' 금지까지 거론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정작 집회를 관리하는 경찰은 '야간집회' 관련 실태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민 불편'을 명분으로 연일 야간 집회를 맹비난했던 정부·여당이 그동안 명확한 근거도 없이 헌법에 보장된 시민들의 집회할 권리를 제약하려 한 모양새다.
당정 입 모아 '야간집회는 불법집회'…강경 대응으로 손발 맞춘 경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국무회의에서 "1박 2일에 걸친 민노총의 대규모 집회로 인해 서울 도심의 교통이 마비됐다"며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까지 정당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엄정 대응을 주문했다.
전국건설노동조합(건설노조)이 같은 달 16일~17일 열었던 '양회동 열사 정신 계승' 1박2일 노숙집회를 '저격'하며 집회 관련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바로 다음 날,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한동훈 법무부 장관·윤희근 경찰청장 등 당정 주요 인사들은 오전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야간집회를 금지하도록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날 "필요한 조치를 통해 선량한 시민의 기본적인 생활권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권리, 주변의 상인의 영업권을 지키고, 일반 국민들의 교통으로 인한 불편을 해소해야 한다"고 야간집회로 시민들이 심각한 불편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집회에 캡사이신 준비한 경찰. 연합뉴스또 윤희근 경찰청장은 민주노총 경고파업 전날인 30일에 "야간문화제를 명목으로 불법집회를 강행하거나 집단 노숙 형태로 불법집회를 이어가 시민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에는 해산 조치하겠다"고 야간집회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집회 당일인 31일에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캡사이신을 분사할 수 있다고도 밝혔고, 경찰은 시위 진압용 '캡사이신 분사기'를 6년 만에 집회 현장에 투입하기도 했다.
경찰, 야간옥외집회 관련 통계 없어…'야간집회=불법집회' 논리, 근거도 없었나?
이와 관련,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서울경찰청을 상대로 최근 5년간(2019년~2023년 4월) 야간옥외집회 실태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서울청은 "야간옥외집회 관련 통계를 별도로 추출하고 있지 않다"며 관련 자료가 아예 없다고 밝혔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서울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은 야간 옥외 집회시위 자료(민원 신고 및 처리 현황 신고건수 등)는 별도 관리하지 않고 있다.
취재진이 경찰청·서울경찰청을 대상으로 다시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해당 부서에서 보유 또는 관리하는 정보가 아니'라며 '정보 부존재' 통보를 받았다. 즉 경찰은 야간 집회의 실태에 관한 자료를 아예 갖고 있지 않다는 답변이다.
서울청 관계자는 "집회 시간대별로 집계된 통계가 없나"고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야간집회를 확인하려면 신고 건수별로 하나씩 확인해야 되고 (집회 신고 건수는) 통계상으로 수만 건 이상이 되는데 전부 확인을 못 하는 상황"이라며 "이런 경우에는 새로운 통계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서 자료 부존재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용혜인 의원실 제공그나마 경찰이 제공한 '최근 5년간 서울 내 유형별 금지통고 현황'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봐도,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펼쳐진 집회는 찾기 어렵다.
경찰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 동안 '금지된 시간에 집회했다'는 이유로 집회 금지통고를 한 전례 자체가 없다. 올해 들어 '집회 금지 시간'을 이유로 한 차례 금지 통고를 내린 것이 전부다.
박종민 기자경찰이 집회를 금지한 다른 사유를 살펴봐도, 당정이 주장하는 '시민 불편'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한 사례 역시 거의 없다.
올해 집회 금지통고가 내려진 139건 중 '생활 평온 침해'가 이유였던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공공질서 위협'을 이유로 금지 통고를 받은 집회도 2건에 불과했다.
다만 '교통 소통'을 이유로 집회 금지통고를 내린 경우는 2019년부터 3년간 한 차례에 불과했는데, 윤 대통령 취임 첫해인 지난해 171건, 올해는 56건으로 급증했다.
결국 집회 관리의 최일선에 있는 경찰조차 야간집회에 관한 통계·분석이 없고, 야간집회를 금지해야 할 정도로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전질서를 명백하게 침해한 최근 사례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과 여당은 객관적인 근거가 아닌, '야간집회가 시민들의 불편을 가중시킨다'는 고정관념으로 '야간집회 금지'까지 나섰던 셈이다.
서울경찰청 <최근 5년간 서울 내 유형별 집회 금지통고 현황>. 용혜인 의원실 제공시민사회 "정부, 시민들의 절박한 목소리 들어야"…야간집회 금지 지적
전문가들은 야간집회로 인해 시민들의 불편이 늘었다는 정부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정치적인 구호에 불과했다며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공권력감시대응팀 랑희 활동가는 "경찰이 수치적인 증거나 시민들의 반응을 정밀하게 취합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며 "당연히도 시민 불편이 (집회로 인해) 가중됐다는 것은 일방적인 판단, 주장"이라고 말했다.
자주 열리지도 않는 야간집회를 콕 집어 문제삼은 정부·여당의 속내에는 집회 자체를 금지·단속해야 하는 대상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주장도 나왔다.
랑희 활동가는 "(집회를 하면)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편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며 "그런데도 기본권과 시민의 불편을 동등한 권리의 대결 구도로 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짚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태평로 일대에서 열린 경고파업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부가 노조와 전혀 소통하지 않는 '불통 정권'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박종민 기자정작 집회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도 밤 늦은 시각까지 집회에 참여하도록 시민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야간집회를 선택한 이들이라면, 정부가 집회를 틀어막기에 급급하기보다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듣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권네트워크 바람 명숙 활동가는 "직장인들은 낮에 일해야 하고, 지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올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래서 야간 집회를 하고 노숙 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예를 들어 국가기관이나 원청인 재벌 대기업 본사가 주로 서울에 있으니까, 지방에 사는 노동자들에게 야간집회는 필요한 것인데, 야간집회를 막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차별적인 일"이라며 "건설노조, 대법원 앞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어려움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들이 '절박하다'고 호소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또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주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최근 대통령실에서 야간집회와 노숙 농성을 금지한다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한다"고 꼬집었다.